물속 깊이 잠긴 그리움의 저 편에서 . 8
-함께 가는 먼 길
권 옥 희
고향 가는 설레임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지나고
2014년 4월 26일 1시 30분경 군자역에서
고향 가는 범아관광버스 두 대는
1시부터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고향 사람들을 태우고
신록으로 둘러싸인 고속도로를 달려간다.
꽃잎을 떨어뜨린 잎들은 저마다
푸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기로 약속이나 했는지
번져가는 산과 들의 푸른빛이 예사롭지 않다.
넓은 버스 창으로 들어오는 푸름을
맘껏 받아안는 마음이 싸하다.
엘리엇의 잔인한 4월 아니랄까봐 세월호 침몰참사로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묻은
어린 아들 딸들의 아까운 죽음에
온나라가 슬픔에 잠겨 애도의 물결이 출렁이는 가운데
일정이 잡혀 있던 축제나 행사가 줄줄이
연기되거나 취소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우리도 1년에 한 번 임동에 뿌리를 둔
고향 선후배들이
잃어버린 옛고향 그리움의 끝을 잡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친목을 다지는 총동창 체육대회를 열기엔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그래도 몇십 년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어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게 치르기로 했다.
 
꽃 피는 봄이라고 경쟁하듯 피어난 꽃들에게
마음 빼앗기길 얼마되지 않아
갑작스레 진도 앞바다에서 날아든 비보의 뉴스속보는
몇며칠 티비를 도배하면서 눈과 귀를
뉴스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러는 사이 꽃들은 저 혼자 피고 지고
지금은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온통 푸름,
슬픔은 견뎌내는 거라고 자연은 저렇듯 푸르게
희망을 내걸어 우리를 위로했다 .
그 사이사이 라일락꽃은
슬픈 마음을 후벼파는 향기로 가던 길도 붙들어매고
잠시 그 꽃그늘에서 멍해지는 때가 길어진다.
슬픔도 길어지면 병이 된다고 영랑은 그래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난 아직도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하면서
역설적으로 기쁘게 봄을 맞겠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새 그 모란도 뚝뚝 떨어지고 있다
봄은 희망의 계절이다.
슬픔 뒤에 오는 희망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줄까?
차창밖으로 스쳐가는 평화로운 산골마을을
보는 것도 기쁨이고
버스 안에서 음주가무 대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한층 가까워진 고향을 보는 것도 기쁨이다.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슬픔이어도
잊어야 하는게 우리 삶이고 보면
어쩌면 희망 하나 더 얹은 찬란한 5월을 맞기 위해
4월은 우리에게 이토록 잔인한 슬픔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버스 안에서 우리 은희가 새벽같이 일어나
부친 부침개와 김밥,
머리고기를 안주삼아 막걸리도 한순배 돌고
함께 탄 기수를 보니 하마 우리 46회가 제일 연장자다.
세상에나~
2006년 은희와 처음 만나 고향 친구들과 인연이 닿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처음 갈 땐 그래도
겁없고 싱싱한 나이였는데
벌써 아홉번째 가는 고향 길은
약간의 흰 머리도 감출 길이 없고 눈가에 잡히는
주름도 감추질 못한다.
그러는 사이 벌써 몇 명의 친구가 세상을 등졌고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고향에 갈 때마다
소풍 가는 아이처럼 설레서
잠을 못 이룬다는 것이다.
이번 고향길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55회 동생들이
내가 처음 고향 갈 때의 그 설레임으로 함께 동행했다.
반갑고 이쁜 동생들, 이제 오랜 세월을 돌아
함께 가는 먼 길에 첫 발을 내딛었으니
고향사람들과 함께하는 산행 때나
다른 행사 때에도 자주 보게 되겠지.
곧 지천명의 나이에 닿겠지만
아직은 마흔 아홉이 그저 좋기만 하단다.
그 동안 고향 행사에 주축이 됐던 40대 기수는
어느새 한 고개를 넘어가버리고
이제는 50대 기수들이 고향을 열어간다.
이번 총동창회 체육대회의 주관기수는 5228!
서로 사는 게 바빠 오랫 동안 잊혀졌다가
소문으로만 듣던 친구들 연락처를 수소문 하고 찾아내어
함께 추억의 수학여행도 멋지게 다녀왔던 동생들,
그래서 1년 동안 알차게 준비했을
올해 행사가 기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음악과 노래도 없이 어떻게 흥을 돋울지
잔치에는 무엇보다도 쿵쾅쿵쾅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흥을 돋울 음악이 필요하지 않은가
앞서 출발했던 우리 버스와 뒷차는 치악휴게소에서 만났다.
우리 향우회장님, 산우회장님 사무국장님 어른들은
왜 안 보이나 했더니 뒤에 출발한 버스에 타고 계셨다.
그리고 승용차로 가던 영표네 48회도 만났다.
견우 직녀 만난 듯 휴게소 주차장이 시끌시끌하도록
우리는 반가워하며 사진도 찍었다.
5시경 안동역에 도착하면 우리 46회는
전야제장소인 대게의 고장 강구로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어떤 기수는 안동댐에서, 또 어떤 기수는 옥동에서
고향땅 곳곳에 숨어든 우리 향우회 식구들
조용했던 안동시내를 들었다 놓으며 반갑게 만난 친구들과
즐겁고 행복한 회포를 풀게 될 거다.
행사날은 비 오고 춥다고 해서
두꺼운 옷도 넣고 모자 대신 우산도 넣어왔는데
제발 비가 오지 않기를 천지신령님 다 불러모아 빌었다.
내가 참여한 지금까지 신기하게도 일기예보는 빗나가서
비 때문에 행사를 망친 적은 없다.
대신 주관기수들의 애간장을 태우며
가끔은 빗방울도 뿌리고 꽃샘바람도 불러오곤 했다.
아마 우리 46회 행사할 때도 그러지 않았나 싶다.
어느새 버스는 안동역에 도착하고 곧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말에
우리는 기념사진도 찍었다.
엄마 손잡고 이 안동역에서 서울로 떠난 이래
47년만에 서 보는 안동역이다.
흑백의 필름을 돌리는 것처럼 내 기억에 각인된 안동역
흘러간 시간만큼 옛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채우며 발전해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어느새 우리는 새로운 것보다 옛것이 그리운 나이다.
그래서 고향은 늘 그리운 것이고
그 그리움의 끝을 잡고
우리는 옛기억을 더듬으며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우릴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친구의 봉고차에 올라탄
우리 열 명의 친구들은
말로만 듣던 석순이의 강구항으로 바람같이 달려간다.
좀더 색다르게 바닷가에서도 한번 만남을 가져보자고 해서
얼마나 기대하고 들뜨게 했는지
오늘 우리가 머물 바다가 보이는 집 프라다 팬션에는
몇 명의 친구들이 모일까?
팬션을 잡아놓은 광호는 며친 전부터 영양까지 가서
맛난 회 싸서 먹을 개두릅을 따 놓았다고 군침 흘리게 하고
우리 옥례는 산나물 뜯어다가
산나물 김치도 맛나게 해놓았다고 했는데
기대 안 하면 사람이 아니지~

아, 해는 벌써 서해 끝자락에 걸렸는지
동해 바다에는 해그림자가 지고 있다.
팬션에 도착하니 55명의 친구들이 모인 떠들썩한 분위기에
석순이는 돌문어를 썰고 있고 옥례는 밥을 하고
또 하고 있었다.
베란다에 서니 어스름 속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똑같은 바다인데 한쪽은 즐거움, 한쪽은 눈물바다
참 공평하지도 않다.
그래도 언제까지 슬퍼만 할 것인가
친구들과 반가운 손인사, 눈인사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야들아, 나는 안 보이나!"
문어를 썰고 있던 석순이가 그 특유의
육두문자를 써가며 고함을 친다.
헤~ 석순아, 미안! 나는 자석처럼 석순이가 썰고 있는
곁에서 문어만 먹었다.
뷔페에서 먹는 문어가 어찌 이 맛에 비하랴~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회무침, 새우, 홍게
바다가 통째로 우리 방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옥례가 애써서 뜯은 산나물로 만든 김치도 맛있고
광호의 개두릅에 싸먹는 회맛도 죽여준다.
상만이가 까준 새우도 맛있다.
또 희준이가 속살만 쏙 빼서 주는 게살맛도 끝내준다.
"너희들이 게살맛을 알아!"
흐흐~ 먹을 게 많아 배가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때가 때인 만큼 노래방은 생략이다.
언제나 시끌대며 노래하고 춤춰야
전야제가 끝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1년에 한 번 만나는 친구들과
느긋하게 수다떨어가며
맛있는 거 먹는 재미로만 보내는
전야제도 나쁘지 않다.
은희가 몇 년 지나 운동장에
우리 자리 없어지면
이렇게 좋은 곳 찾아다니며
전국 투어 하자고 말했다.
잠을 잔듯 안 잔듯 새벽 여명이 오고
해가 바다를 밀고 올라오는 걸 누워서도 보았다.
강구까지 와서 바다를 안 보고 가면 섭하지.
부지런히 화장을 하고 아침밥 하는 옥례한테는
거들지 못해 미안했지만
은희와 바닷가로 나갔다.
저 건너 유명한 대게 축제장이 있는 삼사
해상공원이 보이고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강구의 바다는 너무 조용했다.
비 오고 춥다는 것은 기상대의 오보~
우리는 좋기만 했다.
속까지 들여다 보일듯한 맑은 바닷물에
살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울컥울컥 쏟아냈다.

석순이가 집에서 끓여온 매운탕과
친구들이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그냥 좋다는
옥례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하며
상큼한 산나물 겉절이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복숭아단지로 유명한 영덕 가는 길을 되짚어
빛깔 고운 꽃복숭아꽃에 눈길을 빼앗기다가
비가 안 와서 다행이라고 했더니 옆에 앉은 상걸이는
자기가 어젯밤에 하늘 구멍을 다 막아놓았다고 했다.
그려 그 마음이 내 마음이었지.
비가 주룩주룩 오면 1년 동안 애써 행사를 준비했던
류기혁대회장을 비롯해서 내가 알고 있는 대섭이,
사룡이, 은경이 자야 등등
5228주관기수는 얼마나 힘이 빠질 건가.
신촌 약수터에서 쇠맛 나는 물을 몸에 좋다고
한 바가지씩 들이키고 운동장에 들어서니
기다림의 뜻을 가진 노란리본을 나누어 주며
긴 줄에 묶으라고 했다.
나라의 아픔을 함께 하는 후배들의 센스가 돋보였다.
무대에는 참여 한마당, 화합 한마당, 도약 한마당이라는
임동 총동창 한마음 체육대회 및 면민화합잔치의
슬로건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제 천막도 40회부터 63회까지다.
류수만, 이상연언니 등 40회 선배님들은
운동장에 오고 싶어도 못 오지 않는가?
이번에도 자리가 없을 줄 알고 안오고 계신
40회 선배님들께 옥례가 자리 준비되어 있으니
얼른 오시라고 전화를 드렸고 그때서야 오셨단다.
어찌보면 슬픈 일...
우린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참여하고 싶은데
해가 갈수록 밀려나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어줘야 할 때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마음이 짠해진다.
그래서일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모두 한 고향을 품고 함께 가는 먼 길에
동행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 기수 푯말을 들고 맨 앞에 섰다.
간단한 개회식이 시작되고 김명숙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전교생 23명, 더구나 2학년은 1명 뿐인 학교지만
100여년의 역사를 앞두고 우리의 이런 행사가
폐교 위기의 학교를 지켜주는 징검다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장학금을 수령하는 6학년 대표 어린이는
얼마나 잘 생기고 똑똑해 보이던지
분명 임동을 빛낼 인재가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생각에 생각을 자꾸하면 업그레이드가 되는 것처럼
43회 언니들이 왜 한복을 입었나 했더니
올해 환갑을 맞은 축하로 대형 케잌 커팅을 하는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게임도 예전과는 달랐다.
장갑을 접어서 오재미처럼 만들고 머리에 이고 있는
자기팀 바구니에 집어 넣는 오재미넣기는 재미있기도 했지만
바구니를 이고 한 개의 오재미라도 더 담으려는
그 표정이 더 웃겼다.
풍선터뜨리기도 2인1조로 달려가서 터뜨리는 게 아니라
발목에 묶어서 서로가 서로를 적이 되어 터뜨리는 것이었다.
43회 언니들은 게임할 때는 한복 치마 속에 풍선을 감췄다가
살아남은 숫자 셀 때는 치마를 들쳐올리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줄다리기는 예전에 없이 긴박하고 팽팽한 접전이었다.
선배라고 봐주기 없이 힘대 힘으로 겨루는 경기는
박빙을 이루었다.
우리의 첫 상대는 47회~
옥례는 몸살 날 일 뭐 있냐며 힘 쓰지 말고
그냥 끌려가라고 했다.
그런데 어디 실전에는 그렇게 되나~
신호와 동시에 눕다시피 버티기 작전으로
우리 46회가 이겼다.
그 바람에 꽁무니에 매달렸던 은희는 그냥
운동장바닥으로 나자빠졌다.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다음 상대는 아직도 힘을 쓸 수 있는 51회.
이번만 이기면 준결승이니 또다시 눕기 작전이다.
나는 어깨가 아픈 환자라는 것도 잊고
있는 힘껏 몸을 젖혔다.
밧줄이 조금 끌려오는 듯 마는 듯 버팅기기를 하는데
갑자기 줄이 확 넘어온다.
왜 그런가 했더니 개구쟁이 우리 기하~
응원한답시고 들고 있던 우리 기수 푯말로 상대팀 발을
건드려반칙패 한 것이었다.
다들 왜 그랬냐고, 이길 수 있었는데 아깝다고 했다.
결국 젊은 후배들을 다 무찌르고 48회와 49회의 결승전은
노익장이 발휘된 볼만한 경기였다.
누구를 응원해야할지, 48회는 내 동생네 동기들이다.
영표, 병국이, 연진이가 힘쓸 준비를 하고 있고
49회는 기락이와 병덕이가 포진해 있다.
그래, 누가 이긴들 어떠리. 아무나 이겨라.
3판 2승의 경기 결과는 한 살이라도
어린 48회의 우승이었다.
그러나 전체 우승은 오재미넣기에서 2등,
풍선터뜨리기에서 2등한
우리 46회가 종합점수로 우승했다.
몇해전 2년 연속 우승한 이래 3번째 우승이다.
나는 옛날 운동회 하던 생각이 나서 3게임 다 출전했다.
우승기를 가운데 두고 우린 아직 살아 있다며
다같이 46회 화이팅을 외쳤다.
음악과 노래자랑이 없어도 즐겁게 게임을 해서인지
시간이 금방 갔다.
은희와 철현이랑 여기저기 선후배들 천막을 찾아다니며
인사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모두가 반갑게 손잡아주고 환한 모습으로
고향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임동의 보배 기룡이는 어디 갔나?
기룡이가 있어야 더 시끌시끌할 텐데, 엄마 보러 갔나...
운동회에서 빠지면 속 빈 찐빵~
운동장입구에서 가마솥에 설설 끓고 있는
소고기국밥 한 그릇 받아서 달게 먹었다.

멀리 아기산이 눈에 들어온다.
물바람도 느껴진다.
어느새 63회 막내 기수가 들어오고
이제 88년 새학교가 지어지기 전, 수몰 전의 기수는
65회까지란다.
그러면 더욱 더 고향에 찾아올 일이 짧아질 수도 있다.
내가 늘 보면서 자라고, 내가 늘 품에 안고 살았던 아기산은
이 운동장에서 옛 추억을 더듬으며 웃고 있어도
학생 수가 줄어듬에 마음 졸이는 우리의 마음을 읽고
있을 거다.
그래서 우리의 이런 소중한 만남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을 붙여본다
5228 주관기수 동생들 고생 많이 했고
내년에 주관기인 종현이와 기룡이네 5329동기 들은
커다랗게 프랭카드를 만들어
내년에도 변함없이 체육행사에 많이 참여해달라고 했다.
1년에 한 번 이렇게 고향을 찾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복 받았다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복이 맞다.
살아 있어서, 건강해서
열 일 제쳐놓고 그 곳에 가면 그리움이 있고 반기는 친구가 있다.
갈 때는 신나도 돌아서 오려면 또다시 먹먹해지는 곳
내 고향 임동~
그리움은 다시 추억을 만들고
내가 슬픔에 물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
그 고향이 있어 나는 좋다.
마카다 안 그러이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