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 깊이 잠긴 그리움의 저편에서 · 7
- 그리움을 지우고 추억을 얻고
권 옥 희
봄이다! 라고 소리치는 순간 봄은 우리 곁에 왔다.
새싹들을 데리고 꽃들을 피우면서 봄은 소리없이 와 있었다.
그런데 올봄은 보드라움도 없고 따뜻한 느낌도 없다
아니, 보드라움도 느낌도 잃어버렸다. 누구에게 빼앗긴 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음을 들뜨게 해놓았다가 움츠러들게 했다가
한 달 넘게 감기로 몸서리치게 만들었다가
꽃 지고 말면 그 뿐이라고 봄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
늘 고향 그리며 향수에 목메이던 우리 엄마,
머리 뽀글뽀글하게 지지고 고향에 가자던 우리 엄마
꽃 피고 꽃 지는 것도 모른 채 누워
연분홍 치마 휘날리는 꿈 속에서 슬픈 봄날이 가는 걸 알기나 하시는지
꽃구경도 못 갔는데 바람에 실린 빗방울의 무게를 못견뎌
꽃들이 지고 있다. 그리운 봄이 지고 있다.
올 봄은 그랬다. 아직도 춥다.
따뜻함이 그립다고 하늘을 보다가
그래도 때가 되었다고 하늘을 덮은 목련이며 벚꽃을 보았을 때
소리없는 설렘을 난 몸으로 받았다. 그런데 꽃들이 진다.
지는 건 무엇이든 슬퍼 다시 하늘을 본다.
팔랑팔랑 나부끼는 꽃잎들 사이로 뻐근한 봄을 가슴에 끼워넣는다.
그리고 손꼽아 기다려왔던 날을 펼쳐본다.
물 속 깊이 잠긴 그리움의 저편으로 그리움을 지우고 추억을 얻는 날.
바로 고향에 가는 날이다.
임동초등학교 총동창 한마음 어울잔치에서 고향 사람들을 만나고
깨복쟁이 친구들을 볼 수 있다는 건 일 년의 수많은 날들 중에서
가장 기억되고 행복한 날이다.
해마다 꽃들 한창일 때 고향 가는 길은 설레고 즐겁다.
잊고 사는 것이 많은 오늘 날,
날마다 새록새록 내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어
나는 이 봄이 가기 전에 그리움 하나를 떼내고
추억 하나를 건져올리러 고향에 간다.
올해의 주관기수는 51회 동생들.
벌써 50회를 넘어가니 10년도 금방이다 싶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고향의 한마음 잔치에 참석할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제발 널뛰기하는 봄날씨가 이 날만큼은 따뜻하고 눈부셔서
고향사람들, 그리고 친구들 마음을 활짝 열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은 추억을 얻어올 수 있기를
날마다 기원했는데 아, 아침부터 비가 온다.
봄날 간다고 누가 슬피 울기라도 하나~
에이, 하느님 너무 하시다~ 속으로 투덜투덜
애꿎은 하느님 원망하면서 미용실에 머리하러도 안 갔다.
향우회서 준비한 버스로 우리 친구들 일곱 명 간다고 했었지?
하룻밤 집을 비우는데도 여자들은 할 게 너무 많다.
은희는 버스 안에서 먹을 전도 부쳐온다는데
나는 그런 것도 안 하면서 자꾸 꼼지락거리면서 시간을 죽인다.
겨우 쑥국 한 솥 끓여놓고 부지런히 준비해서 만남의 장소인 군자역으로 갔다.
그런데 만차라고 알았는데 버스 자리가 군데군데 비었다.
늘“은희야, 옥희야 왔냐!”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반겨주시던 김용진선배님도 안 보이시고
“언니 왔어?” 하며 해맑게 웃던 금옥이도 안 보이고
왁지지껄했던 49회 동생들의 전용석이 되었던 맨 뒷자리는
오랜만에 44회 선배님들이 자리를 잡으셨다.
함께 고향에 가자고 약속해놓고 따로 가는 동기들은
친구들끼리 도란도란 가는 것도 좋겠지.
우리도 처음엔 친구들과 그렇게 갔었으니까
하지만 나이들수록 고향의 언니, 오빠 동생들과 함께
정을 나누며 가는 버스여행이 갈수록 더 좋아진다.
친구들은 다 먼저 가버리고 우리 기룡이 어김없이 또 일꾼이 되었다.
거기다 상탁이랑 명화, 친구들 어디 두고 짱구아빠도 오늘은 혼자다.
기룡이가 준비한 도토리묵 한 상자를 버스 안에서 나눠주는데
동생들이 없어 졸지에 버스 안의 막내가 되어버린
은희와 내가 서빙담당. 서툴지만 팔을 걷어부치고 묵도 담고
은희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부친 부추전도 접시에 담아 돌렸다.
거기다 낚시 좋아하시는 44회 김원규 선배님이
전날 바다낚시 가서 잡았다는 싱싱한 광어와 우럭회를 들고 오셔서
낮시간이지만 안주는 푸짐했다.
늘 함께 가던 선베님들과 동생들이 보이지 않아 허전했지만
손에 손에 술 한잔씩 나눠 마시며 서로 소개도 하면서
고향 가는 길은 즐겁기만 했다.
가도 가도 흩뿌리는 빗방울. 작년에도 4월 21일, 올해도 같은 날. 똑같이 약속이나 한듯 비가 온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51회 동생들이 얼마나 애가 탈까? 생각하니 봄비~ 나빠! 하면서 슬슬 미워지려는데 그 새 하느님 내 마음 훔쳐봤나? 문막 지나고 나니 빗방울이 잦아든다. 널뛰기하듯 추웠다 바람 불다 잔인한 4월의 종잡을 수 없는 봄날씨에도 꽃들은 제가 피어날 수 있는 한 피어나서 창밖으로 내 눈길을 잡아끌고 치악을 지날때쯤 옅은 안개가 스멀스멀 중앙고속도로를 점령한다. 그러다가 영주를 지날 때인가, 눈이 살포시 산등허리를 덮고 있지 않은가? 불과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한쪽 산은 비 왔다고 머리에 허연 김을 뿜고 있고 한쪽은 때아니게 내린 눈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린 싹들을 산이 품어줄 수 없어 애타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굴곡 많은 우리네 인생 같아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자연의 오묘한 표정을 잡으러 연신 창밖으로 셔텨를 눌러댔다. 우리는 안동의 고택 숭실재에서 전야제를 할 것인데 은희네 큰언니인 명희언니네 39회는 필히 참석할 것이고 그러면 고향에 뿌리를 둔 동문들이 최소한 39회부터 62회, 무려 24개 기수들이 오늘 안동에 모인다는 것인데 안 봐도 불을 보듯 각 기수들이 곳곳마다 모여 오늘밤 우리 고향 안동을 들썩거리게 만들 게 뻔했다. 기룡이는 안동가수 이수나까지 합세했다는데 얼마나 신날까? 우리는 고택에 머물지만 노래방기계까지 아예 돈 주고 사서 설치했단다. 거기다가 염소탕에 영양탕까지 아주 여친, 남친 할 것 없이 몸모신용으로 큰 가마솥으로 두 솥이나 펄펄 끓고 있다니 빨리 달리는 버스도 느리게만 느껴졌다.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서 친구들 얼싸안고 조선의 여인이 되어 있는데 봄날의 짧은 해가 빨리 지면 어쩌나 조바심 나서 몸이 꼬일 무렵 ‘여기는 안동입니다.’하는 서의문이 나타났다. 그렇게 어둑해질 무렵에야 다시 흩뿌리는 빗방울 속에 우리는 선배님들과 동생들을 버스에 남겨놓고 천 년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숭실재에 도착했다. 서안동 서후면 우리 조상님 권태사묘를 조금 지나 고즈녁이 자리잡은 숭실재. 이곳은 풍산 류씨 금계재사로서 서애 유성룡의 부친인 풍원부원군 입암 류중영이 선조의 묘제를 지내기 위해 지어졌는데 제사를 직접 모시는 사당이 아니라 제를 지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억불숭유정책의 일환으로서 안채는 원래 절이었단다. 그 절을 없애고 양반님네의 재실로 쓰게 되었으니 그 역사가 천 년. 우리가 회의하고 노래부르고 논 아랫채는 오백년. 시공을 초월한 이곳에서 나는 타임어신을 탄 듯 기와선의 날렵함이며 오래된 서까래며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마루의 기둥에 어깨를 댄 채 가만히 우리 조선의 숨결과 이곳을 스쳐간 수많은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가마솥에 끓고 있는 염소탕을 한 그릇 받아들고 맛있게 먹으면서 이 날을 준비하려고 우리 안동의 친구들은 추운데 참 고생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다. 멀리서 고향을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안동의 진짜가 무엇인지 좀더 특색있는 만남을 가지려고 전날부터 와서 녹슨 가마솥을 닦고 마루에 바람막이 비닐을 치고 노래방 기계를 설치했단다. 고향에 살지 않으면 그런 것을 안 해도 누가 뭐랄 사람 없겠지만 우리 친구들은 언제 어느 때고 고생을 마다 않으면서 고향에 모임이 있으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난 그게 미안하면서도 좋고, 우리 친구들이 멋지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뜨끈하게 군불 지핀 방마다 친구들은 삼삼오오 이불 속에 발을 묻고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한해 동창회의 결산과 회의가 끝나고 즐거운 여흥의 시간. 천 년 동안 조용했던 고택에서 갑자기 울려퍼진 음악과 노래소리에 어둠을 즐기러 나왔던 귀신들도 놀라 기절하겠지만 이미 넘치는 흥의 선을 넘어버린 우리는 멈출 수가 없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46호로 지정된 이런 문화유산을 지켜나가려면 홈스테이를 해서 기금을 마련해야 망가진 곳을 보수도 하겠지만 고택체험을 하면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건 훼손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첫째도 둘째도 화재예방이라는 걸 우리 모두 마음에 새겨넣었다. (다음날 옥례는 운동장으로 갖고갈 부침개를 준비한다) 11시가 조금 넘자 은희와 나는 고택에서 머물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와 태화동 옥예네 집으로 향했다. 어떻게 알고 광호가 어두운 길 조심해 가라고 배웅한다. 사실 우리도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 묵직한 허리 지지며 친구들과 못다한 수다 떨며 밤을 지새고 싶지만 우리 친구들의 대모, 옥예는 아침에 할 일이 많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간다. 다른 친구들은 모르겠지. 저희 둘만 맨날 빠져나간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언제나 친정언니처럼 바리바리 싸주는 우리 칭구 옥례) 집에 도착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냉장고에는 맛있게 익은 안동식혜가 두 들통이나 있다. 아이구 손도 크지. 어디 그 뿐인가? 직접 농사 지은 것이라며 내일 부칠 녹두빈대떡 반죽부터하고 또 야채전 재료 썰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두 시가 지난다. 은희가 목말라하자 작년에 중국 여행가서 30만원이나 주고 사왔다는 보이차를 한덩이 뚝 떼서 바글바글 끓여 주는데 나는 제대로 된 차, 진한 보이차를 찻잔도 아닌 대접으로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옥예가 “야야, 안 있나~ 우리 친언니 왔을 때는 아까워서 가루만 쪼매 넣어서 끓여줬는데 친구 왔다고 나도 모르게 한덩이 뚝 떼뿌랬다.” 흐흐~ 그랬구나. 친구한테는 뭘 줘도 아깝지 않다 이거지~ 고맙고 자상한 친구, 진짜 차 한대접 잘 마신 탓에 사랑하는 친구의 마음까지 담은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런데 에구구~ 벌써 여덟번째 옥예네 집에 찾아오건만 오늘도 도란도란 서로 소식 모르고 살았던 옛날 얘기 들어보기는 또 틀렸다. 전날 고향 간다고 설레서 설친 잠이 몰려오면서 뜨끈하게 덥혀진 전기장판에 등을 대자마자 세상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아침 환한 햇살 속에 가뿐히 눈을 뜨자 역시 하늘은 우릴 버리지 않았구나. 날씨에 따라 사람 마음도 휘둘린다더니 만국기 휘날릴 운동장으로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을 만큼 들떴다. 서둘러 야채전 반죽을 하고, 빠트린 것 없나 둘러보며 챙길 것 챙기고 언제나처럼 옥예가 끓여준 토종된장찌개에 뒷뜰에서 키운 하루나빠겉절이로 욕심껏 밥을 한양푼이나 비벼서 볼이 미어져라 아침밥을 맛나게 먹었다. 커피귀신인 내가 커피 한잔을 타들고 뒷뜰 뚝방으로로 나가니 옥예는 우리 준다고 달래를 캐고 있고 은희는 연신 사진을 찍고 있다. 자연이 좋아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 묻혀 살고 싶은 친구, 그녀에게 딱 맞는 집이 이 집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릴 보고 꼬리를 흔들어 주던 작년의 그 복순이가 없다. 하필이면 여름 복날, 누군가 슬며시 데려가버렸단다. 에구 가엾은 복순이~ 대신 복순이가 살던 집에는 참말로 희안하게도 얼굴은 원숭이, 몸은 개인 몽실이가 살고 있었다. 낯가림 하는지 얼굴을 안 보여주려고 하더니 자기 엄마가 붙들어 안으니 마냥 좋아라한다. 몽실아, 너의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만 혼자여서 외로운 엄마한테 애교 많이 떨면서 마음 잘 달래주고 누가 잡아가려고 하면 물어뜯어서라도 절대로 잡혀가지 말고 엄마랑 오래오래 잘 살아~ ↑ (옥례네 몽실이 아빠는 원숭일까요?) 셋이 나란히 앉아 서둘러 화장을 한 뒤 친구지만 친정엄마처럼 옥예가 바리바리 싸준 보따리를 들고 나 태어나면서 묻은 탯줄을 찾아 임동으로 GO GO~ 낙동강 가를 달리는 차창으로 스며드는 고향의 향기는 연분홍치마 날리듯 온통 벚꽃을 흩날리며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옥에는 송천에 들려 떡을 찾아가야 한다고 한다. 며칠 동안 길가는 오염됐다고 산기슭만 찾아다니며 쑥을 뜯어다가 다듬고 데치느라 바쁘다 바뻐, 바쁜데 왜 이렇게 즐겁냐고 카페에 글이 올라오더니 그 쑥으로 쑥떡을 했으니 얼마나 맛있을까? 뿐만 아니라 콩 넣은 송편도 했단다. 참 그 정성이란~ 가장 가슴에 깊이 묻어두고 있으면서도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볼 수 없는 친구지만 친구들을 위해 내 것 아까워 안 하는 옥예의 저 넓고 멋진 마음을 본받고 싶다. 가다보니까 방앗간 옆에 송천초등학교도 총동창체육대회를 하던데 떡을 찾으러 온 사람들이 송편과 쑥떡을 맛보더니 “아지매요, 고마 임동 가지 말고 그 떡 가지고 여서 노시더~”그랬다나~ 임동 들어 가는 입구는 그야말로 꽃대궐을 차려놓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노래가 절로 나온다. 내겐 늘 낯설지만 가끔씩 물바람이 건너와 잠시 놀다 가는 고향 마을도 이맘 때면 한 번씩 차들과 사람들로 시끌벅적해지고 운동장엔 펄럭이는 만국기만큼이나 많은 동문들이 전국 곳곳에서 모여 들었다. 총동창 체육대회 행사가 이제는 임동면민 화합잔치와 곁들여지니 임동의 피를 받은 모든 사람들의 잔치인 셈이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국밥의 구수한 내음과 푸짐한 경품들 환한 봄햇살 아래 일 년만에 보고 느끼는 또다른 맛은 매번 내 마음을 담금질하면서 어린 날 운동회 할 때의 그 시절로 돌아가 있게 했다. 저기 어딘가 지금은 십 년 넘게 꽃구경도 못하고 누워만 지내시는 엄마가 그야말로 연분홍치마를 나부끼며 내 딸 빨리 달리라고 손 흔들고 있는 듯한 착각 아지랭이 탓만이 아니라면 내 눈시울이 지금 붉어지고 있는 거다. 꼭 엄마, 아버지처럼 연세 드신 어른들이 모여 국밥을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더욱 부모님 생각이 난다. 개회식이 시작되고 초청인사들의 축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듣게 된 김명숙 교장선생님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올해 신입생이 갈전에 사는 어린이 달랑 한 명이고 전교생이 유치원생 포함해서 29명이라고 했다. 고향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떠났는데 누가 이 땅을 지켜내란 말인가? 우리가 다닐 때는 거리가 먼 마을에 분교까지 두고도 한반에 5~60명, 전교생이 몇 명이였더라? 아마도 천 명은 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애국조회 할 때 설 자리가 없었던 저학년들은 고학년들 뒤에 서면서 빨리 4학년이 되어 교장 선생님이 보이는 앞에 서 보는 게 소원이었겠지. 곱고 아름다운 여자 교장선생님은 엄마의 품처럼 자신의 34년 넘는 교직에서의 노하우를 살려 절대로 우리 임동초등학교가 폐교되는 일은 없게 할 것이라고 했다. 비록 전교생 수는 적지만 교육만큼은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살려 명품 학교로 만들 거라는 말이 새삼 마음에 와 닿았다. 아예 기숙학교로 만들어서 학교폭력도 게임중독도 없는 친환경 속의 명품교육으로 명품학교를 만든다면 멀리 도시에서도 학생들이 일부러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독도 UCC공모대회에서 6학년 아이들이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한 ‘독도 한국스타일’로 초등부문 대상을 받은 걸 보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다. 하늘 높이 축포가 터지고 드디어 게임의 시작이다. 이인 삼각 경기를 하면서 척척 발맞춰 잘 달리다가도 그만 엇갈려 철퍼덕~ 조금만 엇나가도 실패하는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 계속 펼쳐졌다. 줄다리기는 참 묘하다. 순식간에 무너지다가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러다가도 끌려가면 그냥 끝 오늘 승리의 여신은 어느 기수의 손을 들어줄까? 새삼 우리가 연속으로 우승했을 때의 기억이 또렷하다. 그 때는 그래도 힘이 펄펄했나 보다. 줄다리기도 공굴리기도 윷놀이도 무엇이든 잘했다. 그런데 작년에는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아 올해는 무엇이든 출전하자고 했더니 줄다리기 신청해놨다고 했다. 우리와 60회가 만나 동생들의 봐주기 작전으로 순식간에 승리~ 나는 줄을 당길 때 힘도 제대로 주지 않았는데 벌써 이겨버리다니, 어쨌든 승리의 짜릿한 맛은 바로 이 맛이야! 우리 아직 죽지 않았다고 팔딱팔딱 뛰면서 자축했다. 다음은 힘이 제대로 붙은 54회~ 포항의 왕초, 퐝섭이 뚱거리 동생이 버티고 있는 팀한테 우리가 어떻게 당해? 벌써 조기축구팀처럼 연두색 조끼로 갖춰입고 일사분란하게 힘의 단합을 보여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포스가 느껴지는 걸. 결국 우린 힘도 못 써 보고 패하고 이번 총동창체육대회의 우승기는 54회로 넘어갔다. 체육대회도 끝나고 노래자랑과 행운권추첨이 이어지면서 이곳저곳 다니며 인사하고 사진 찍고 반가워서 얼싸안고 따라주고 마시고 건배하고 하루가 이제 시작이면 얼마나 좋을까 할 만큼 시간은 쾌속으로 달려간다. 회장님과 먼저 내려온 기락이 동생도 반갑게 해후하고 늘 함께 오던 해동오빠와 재수오빠도 운동장에 계셨다. 그러게, 절데 고향 행사에 빠질 분들이 아니지~ 1년에 한 번 얼굴 보는 40회 가을 선배님은 여전히 건강하셔서 좋고 바다낚시터 운영하시는 류건덕 (작은 건덕)선배님도 반가웠고 큰 건덕 선배님도 뵈었다. 명화와 병연이, 예쁜이들도 보고 쌍카프리오 상탁이 등 우리 향우회 인재들도 만났다. 다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내 머리 속의 한계를 꼬집으며 만남은 언제나 신선하다는 생각을 한다.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고 웃음이 솟으니까. 42회라고 하셨던가? 장터 살던 우리 유일한 친척 권영직이 오빠, 47년만에 처음 보았다. 길에서 보았다면 분명 그냥 스쳐지나갔을 인연 꼬맹이 때 보고 반세기가 되어가는 지금 흘러간 세월 어디로 가고 함께 주름져 가는 모습 보고 오빠와 난 서로 말문을 닫은 채 허허 웃었다. 올해는 62회까지 있으니 갈수록 우리 동문 행사가 젊어지는 것 같아 좋다. 하지만 나이 드든 것도 서러운데 고향이라고 찾아왔다가 기수 천막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더 서글플 것 같다. 실제로 40회 선배님들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 “야야~ 우린 이제 올해만 오고 못 오는 거냐?” “에이 언니, 그럴리가요?” 했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시든 오시지 않든 선배님들이 계셔서 우리가 있기에 주관기수가 여분의 천막을 조금 큰 것으로 준비해서 40회 넘는 기수를 함께 모일 수 있게 해준다면 서로 외롭지 않게 인사도 나누고 함께 올 친구 없 혼자 찾아와도 머물 곳이 있어 좋을 것 같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 우리는 옥예가 부쳐주는 녹두전과 부추전에 광호가 가져온 막걸리로 얼굴이 불콰하도록 먹고 마시고 사진 찍고 음악이 신나면 뒤에서 흔들기도 했다. 목 마르면 생강향기 상큼한 식혜로 목을 추기고 대구의 상석이가 우리 기수 대표로 노래자랑에서 삼각관계를 부를 땐 나도 모르게 우리 46회 팻말을 들고 무대로 뛰어올라가 옥예와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응원했다. 그렇지! 우린 야야, 나가자~ 안 해도 마음이 통한다니까. 아, 갈길은 먼데 오후의 해그림자가 길어진다. 세월이 흘러 호호백발이 되어도 오늘 이렇게 만나가슴에 끼워넣은 추억의 한페이지를 살포시 꺼내볼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생각해보면 한평생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그 삶이 맹물처럼 얼마나 밋밋할까? 너무 그리움에 묻혀 향수병이 짙어지면 안 되겠지만 우리처럼 고향 사람들끼리 때 되면 만나 회포 풀고 고향 얘기 나누고 그러면서 그리움 하나씩 지우고 새로운 추억도 얻는 게 사는 재미라고 생각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고향 일이라면 내 일 제쳐놓고 열정적으로 나서는 선배님들과 동생들을 보면 안다. 거기에 물론 내 친구 은희와 철현이도 있다. 노래자랑이 끝나고 54회가 우승기를 받는 걸 보면서 우리는 떠나야 했다. 수고한 옥예, 혼자 떼놓고 가는 것도 마음 아프고 남아 있는 친구들 손 흔드는 아쉬운 마음의 배웅을 받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만나보면 반갑고 헤어질 땐 서운하고~~ 굳이 노랫말이 아니어도 또 볼 때까지 우리가 이 모습 이대로 있는다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벌써 작년에 보았던 우리 친구가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마음 아픈데, 우리 보다 더 연세 드신 선배님들은 더 할 것이고 또한 아직 한참 후배인 짱구아빠도 얼마전 친구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하지 않았던가? 기다리지 않는 시간, 우릴 싣고 저 혼자만 신나서 가는 시간 그걸 따라가자니 눈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사방이 다 아프다. 그래서 돌아보며 돌아보며 지운 그리움 뒤로 내년에는 또 어떤 마음과 어떤 모습으로 내 고향을 찾아오게 될지 부디 우리 임동초등학교가 어떻게든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수많은 동문들의 안식처기 되어 줄 수 있기를 난 멀리 아기산신령님에게 간절히 빌었다. 여기저기 눈길 닿는대로 고향의 모습을 찍던 은희가 51회 동생들 애많이 쓰고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면서 고향은 환한 꽃길로 떠나가는 우리들의 앞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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