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사라진다.
내가 운동 갈 때마다 담장밖을 내다보며
봄이면 꽃피우고 여름이면 매미앉혀 여름을 울게 하고
가을이면 주렁주렁 매단 감이며 노란 은행잎,
겨울엔 앙상한 가지가 부끄러워 하얀눈으로 눈꽃을 피우던 나무들이
수십 년 애지중지 하던 주인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뒤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몸을 사렸을지
시뻘건 불도저의 이빨 아래 무참히 잘려나가며
주인 잃은 집이 사라지듯
나무가 안고 있던 세월도 사라졌다.
몇 번의 망치소리 울리고 집 두 채 한꺼번에 사라진 자리에
미끈한 대리석으로 겉모양을 치장한 오피스텔이 들어섰다.
이제 골목은 꽃을 보며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보거나
낙엽을 밟으며, 낙엽 태우는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키우거나 추억에 젖는 정겨운 곳이 아니라
그냥 내가 오고 가는 발걸음을 지켜줄 골목일 뿐이다.
오늘 그 옆집 주인이 이사가고 또 하나의 집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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