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사라지는 집

권규림시인(옥희) 저 개명했어요 2012. 5. 20. 15:16

 

 

집이 사라진다.

내가 운동 갈 때마다 담장밖을 내다보며

봄이면 꽃피우고 여름이면 매미앉혀 여름을 울게 하고

가을이면 주렁주렁 매단 감이며 노란 은행잎,

겨울엔 앙상한 가지가 부끄러워 하얀눈으로 눈꽃을 피우던 나무들이

수십 년 애지중지 하던 주인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뒤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몸을 사렸을지

시뻘건 불도저의 이빨 아래 무참히 잘려나가며

주인 잃은 집이 사라지듯

나무가 안고 있던 세월도 사라졌다.

몇 번의 망치소리 울리고 집 두 채 한꺼번에 사라진 자리에

미끈한 대리석으로 겉모양을 치장한 오피스텔이 들어섰다.

이제 골목은 꽃을 보며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보거나

낙엽을 밟으며, 낙엽 태우는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키우거나 추억에 젖는 정겨운 곳이 아니라

그냥 내가 오고 가는 발걸음을 지켜줄 골목일 뿐이다.

오늘 그 옆집 주인이 이사가고 또 하나의 집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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