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KOREA 백두대간의 점봉산 밑 곰배령엔 꽃들이 흐드러졌다. 미나리아재비, 요강나물, 쥐오줌풀 등속이 천연의 물감으로 김아타보다 더 멋진 작품을 거기에 그려놓았다. 그 사이로 난 꿈길 같은 외줄기 꽃길. 곰배령의 여름으로 달려가 본다.
계곡엔 물 소리 한창인데 산밑에선 난데없는 '사물' 소리가 들려온다. 꽹과리, 징, 장구, 북 소리가 그것도 자진모리 장단으로 들려오니 소리 나는 데로 아니 따라갈 수 없다. 우리의 발길을 부르는 곳은 자그마한 교사(校舍)의 나무 그늘 아래. 초등학생 일곱 명이 자그마한 손으로 제법 장단을 맞추며 놀이에 열중이다.
기린초등학교 진동분교는 박봉균 선생님과 일곱 명의 학생들이 오붓하게 꿈을 이뤄가는 곳이다. 박 선생님은 "풀 내음 바람 내음 있는 시골이 좋고, 꾸밈 없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아"서 2년 전 진동분교로 자원해서 전임해 왔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든 다 재미있어요. 아빠와 곰취 따는 것도 재미있고요. 아빤 지금도 뒷산에 곰취를 심고 계실 걸요." 3학년인 지인이의 또박또박한 말에 생기가 돈다.
-열목어와 수달 노는 진동계곡 곰배령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진동2리 설피마을의 오후는 적요하다. 길가의 민박집에 앉아 있는 누렁이는 햇살 피해 그늘에서 졸고 앉아 있고, 아침에 잠 깨우던 새들조차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인적도 거의 없다. 저마다 집안에서 꿀맛 같은 오수를 즐기거나 약초나 산나물 캐러 심심유곡으로 들어갔을 거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와 이름 붙었다는 설피마을. 1미터 정도는 보통이란다. 예전엔 눈이 오면 여지없이 길이 끊기는 바람에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야 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아직 포장은 되지 않았지만 도로 사정이 많이 좋아졌고, 미디어를 타는 바람에 드나드는 외지인들이 많아져 웬만한 도회 못지 않다. 설피마을을 이루는 약 삼십여 집 중 대부분이 숙박업으로 생업을 삼는 것만 봐도 이곳이 얼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는지 짐작할 만하다.
곰배령은 인제군 기린면에 있는 백두대간 상의 고개 중 하나로 점봉산(해발 1424미터) 아래에 자리해 있다. 곰이 배를 하늘로 향하고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해서 이렇게 이름 붙었다. 곰배령이 알려진 것은 한 방송사의 <곰배령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다. '한가닥' 하던 사람들이 도회생활에 지쳐 하나 둘 곰배령 인근에 둥지를 틀고 시골생활을 하며 좌충우돌하는 이야기가 그려졌는데, 도시생활을 하는 이들이라면 그 모습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어 큰 인기를 끌었다.
"예전엔 집들이 이렇게 많지 않았어요. 사람이 많아지니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긴 하죠. 그래도 어쩌겠어? 더불어 살아야지. 난 여기 정원 가꾸는 재미에 요즘 푹 빠져 있어요." '곰배령에버그린'이란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이정순 씨는 부천에 살다가 곰배령 계곡이 좋아 7년 전에 내려왔다. 넓은 정원엔 구절초며 붓꽃, 참당귀, 패랭이꽃 등속의 온갖 꽃들과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설피마을을 지나면 곰배령과 단목령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는데, 여기 주차장부터 드디어 곰배령의 참맛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약 4킬로미터의 곰배령 등산로는 사실 등산이라기보다는 생태 탐방이라는 것이 더 맞다. 따라서 등산에 자신 없는 사람이더라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초등학교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 단위의 탐방객을 환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산을 들어서면 우선 햇볕이 없어진다. 길뿐만 아니라 대지 어디에든 직사광선이 떨어지는 곳은 없다. 그만큼 녹림이 우거져 있다. 사람 키의 몇 길이 넘는 복장나무나 산벚나무, 산목련, 신갈나무, 가래나무 등이 호위병사처럼 서 있는 아래로 속새나 박새, 산죽, 호랑고비 같은 낮은 식물들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어 맨땅이 거의 없을 정도다.
올라가는 길 한쪽으론 계곡이다. 계곡은 곰배령 정상까지 좌우로 계속 길을 따라오는데, 그래서 오르고 내려오는 길 내내 설혹 혼자라도 그리 외롭지 않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 맺히면 지체 없이 몇 발자국 내려가 계곡물에 얼굴을 적신다. 세상사의 시름을 잠시라도 잊게 되는 순간이다. 순정의 계곡물엔 일급수 지표 어류인 열목어와 수달 같은 동물들이 산다고 한다. 계곡은 군데군데 소(沼)와 담(潭), 폭포를 만들어 절경을 빚어놓기도 하는데, 자칫 지루할 것 같은 완만한 등산로를 걷는 이들을 위한 자연의 배려인 듯하다.
-원시림의 축소판, 곰배령 삼림 한 1킬로미터쯤 오르면 느닷없이 인기척이 느껴지고 곧이어 집들이 나타나는데, 여기가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강선마을이다. 해발 팔백여 미터 즈음에 자리해 있으니 그렇게 불리는 것도 과언이 아니겠다 싶다. 그래서 실제로 '곰배령 사람들'이라 하면 이 마을 사람들을 일컫는다.
"집은 십여 채 있는데 상주하는 분들은 여덟 집 정도 되나 봐요. 알려지지 않았을 때가 저는 개인적으로 더 나았어요. 은둔의 개념이 있었거든요."
'곰배령 가는 길'의 '무성'이란 법명을 쓰는 주인은 목공예로 생업을 준비하고 있고 그의 안사람은 직접 담근 된장과 간장, 산나물장아찌 등을 판매하는데, 그 은근한 맛이 기가 막히다.
강선마을의 제일 끝집인 '곰배령 가는 길'을 지나 계곡 돌다리를 건너면 이제부턴 정말로 산길이다.
길은 오로지 한 줄이다. 어딘가에 끝이 있을 그 길은 그러나 끝을 보여 주지 않는다. 굳이 끝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길의 끝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산정 높이 올라가 가슴 밑의 찌꺼기만 털어 버리고 내려오면 될 일이다. 인생의 여정마냥 길은 곡선으로 느긋하게 흐르는데, 굽이굽이마다 넓고 평평한 돌이 있어 힘든 자 쉬어가게 만들어놓았다. 맞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비슷하다. 굽이마다 힘들고 지쳐 못 살 것 같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무언의 버팀목이 나타나 또 다시 희망을 품에 안고 가던 길 가는 것이다.
등산로의 절반 이상부터는 풍광이 열대우림의 축소판 같기도 하다. 생명 다해 여기저기 쓰러진 고목 위로 이끼가 덮인 데다 다래 같은 식물의 넝쿨들이 멋지게 휘감고 있어 동남아의 우림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간밤에 먹이를 찾느라 멧돼지들이 헤집어놓은 산의 속살도 색다른 풍경이다.
그렇게 두 시간여를 오르니 드디어 정상이다. 여객(旅客)의 고단함을 안다는 듯 바람이 먼저 마중 나와 옷 안으로 파고 들며 흐르는 땀을 식혀준다. 이어지는 꽃들의 향연. 노란 꽃 미나리아재비, 하얀 꽃 전호와 층층나무, 보라 꽃 쥐오줌풀, 까만 꽃 요강나물까지 곰배령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생물들은 먼 데서 온 이들을 배척하지 않고 몸을 흔들어 아낌없이 반겨 준다.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 키는 작지만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그네들이 인간보다 훨씬 고등의 생물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날씨 좋은 날엔 설악산 대청봉과 양양의 동해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전망 좋은 곳이라고 안내를 맡은 이상곤 선생이 말한다.
곰배령에 팔베개를 하고 눕는다. 운무 끼어 그닥 맑지 않은 하늘에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역풍과 싸우며 날아간다. 세찬 바람이 몸을 타고 넘어가고 색색의 꽃들이 천연의 향으로 나를 유혹한다. 생에 단 한 번 있을 것 같은 매혹적인 오후 한 시다. 하늘 향한 나의 배를 쓰다듬는다. 다시는 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다.
Detail Informaion ▶가는 길 서울에서 승용차로 곰배령을 가는 방법은 좀 복잡하다. 올림픽대로 강일IC에서 60번 서울춘천고속도로를 타고 동홍천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로 인제까지 간다. 인제에선 31번 국도를 타고 현리까지 간 다음 3군사령부 앞 진방삼거리에서 좌회전해 418번 지방도로 조침령터널까지 달린다. 터널 앞 진동삼거리에서 좌회전해 10분 정도 들어가면 설피마을이다.
▶먹을 거리 설피마을과 강선마을엔 도시처럼 그럴싸한 음식점이 없다. 군데군데 곰취장아찌나 토종 장들을 만들어 파는 집은 있지만 이마저도 많지는 않다. '곰배령 가는 길'의 장과 장아찌가 믿을 만하다. 등산 후 내려오면 오후 두 시 정도 되는데 이럴 때 진동삼거리에 있는 나무꾼과 선녀(033-463-1100)에 가서 시골밥상(1인분 12,000원)이나 산채비빔밥(8,000원)을 먹으면 피로가 싹 가신다. 이 집은 토종닭 요리도 유명하다.
▶머물 곳 설피마을엔 대부분의 집들이 숙박업을 겸하고 있어 잘 곳이 많다. 마을 입구에 있는 민박안내판을 참고해도 좋겠다. 곰배령에버그린(033-463-0342)은 넓은 정원에 예쁜 야생화가 피어 있어 머무는 이를 즐겁게 한다. 단체 손님도 받을 정도로 집이 넓다. 7월 20일 이전엔 6만(평일)~7만(주말) 원 선이고 20일 이후엔 성수기 요금을 적용해 10만 원이다. 신용카드는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의사항 곰배령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생태 파괴를막기 위해 1일 입산객을 1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예약은 꼭 팩스(033-461-0450)로 해야 한다. 팩스엔 특정 양식 없이 입산자 각각 입산희망날짜와 시간, 성명과 주민번호 앞 8자리, 주소, 연락처 등을 적어 보낸다. 평일에는 9시, 10시 두 타임, 주말에는 8시, 9시, 11시 세 타임 출발한다. 월, 화요일엔 입산 금지다.
점봉산 생태관리센터
http://supannae.fores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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