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2
-2017년 내 고향 바로 알기,
수몰고향을 찾아서
권 옥 희
<둘째날 일정>
문화유적답사 부포리 봉화금씨 성성제종택ㅡ예안면사무소방문ㅡ전주류씨삼산종택답사ㅡ진성이씨종택경류정방문ㅡ광산김씨군자마을방문ㅡ옥동손국수(중식)ㅡ신시장장보기
ㅡ구담마을 300년 한옥방문
잔 듯 만 듯하며 눈을 뜨니 어느새 6시다. 바깥은 비가 섞인 안개속에 희붐하니 어둠이 걷혀오고 어젯밤 열기 속에서 밤을 새다시피 했는데도 다들 잘 일어난다. 주방에는 어제에 이어 새벽같이 달려온 부녀회원들이 해장국을 큰 솥으로 한 솥이나 끓이고 있다. 구수한 냄새가 옛날 장터 술국집에서 끓이던 냄새와 학교 운동회 때 운동장 한쪽에서 끓이던 그 냄새였다. 지금도 그 맛을 못잊은 나는 일부러 얼큰하게 끓인 소고기국밥을 즐겨 사먹는다.
역시나 얼큰 시원한 맛이 아침 해장으로 딱이었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다시 쉴 틈 없는 일정 속으로 들어간다. 집안일도 마다않고 이틀 동안 우리를 위해 봉사해준 부녀회원님들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당신의 고향이기도 한 금경수 예안향우회 회장님은 식대값을 기부형식으로 통크게 드렸다고 했다. 이래도 고맙고 저래도 고마운 마음으로 다함께 단체사진을 찍고 출발이다.
어제 서울은 천둥 번개치며 겨울 비가 요란하게 내렸다고 했는데 이곳 안동은 우리의 고향답게 일정을 소화하기에 정말 포근하고 좋은 날씨였다. 그런데 오늘은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리고 안개까지 끼어 바깥풍경이 먹통이다. 이곳이 분명 안동호 주변이라고 했는데 수몰지역 이 맞나 싶게 물구경도 못했다. 예안면사무소 직원들이 출근할 시간에 맞추기 위해 문화유적답사로 부포리에 있는 성성재 금난수선생의 종택을 찾았다. 안동에서 아름다운 길 중에 하나가 예안에서 이곳에 이르는 길이라는데 우리는 그 풍경을 안개 속에 다 놓치고 왔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4호로 지정된 성성재는 화려하게 솟을 대문은 아니어도 아담한 대문이 열려있어 마음 편하게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종택임에도 종손이 살고 있지 않은 빈 집이어서 이곳 저곳을 들여다 보며 일부러 차거운 툇마루에 앉아 옛사람의 숨결을 더듬었다. 집에도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아 회벽에 얼룩이 드리워지고 지나가는 바람만 주인의 숨결을 품어안은 듯 했다.
종택에 꼭 있는 초가집은 방아가 있거나 물품보관장소로 쓰였다고 하는데 이런 곳은 기와를 입히지 않는다고 한다. 성성재 금난수선생은 조선중기의 학자로 역시나 퇴계선생 의 문하생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정유재란 때는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惺齋라는 현판과 八詠詩를 써 주었다고 한다. 종택이 버텨온 세월 그림자를 엿보며 우리네 삶은 이 집에 비하면 한 점 먼지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예안면사무소로 이동이다. 아무도 따가지 않은 감나무의 감이 홍시가 되어 너도 나도 따먹는데 김경식상임부회장님이 두 개나 따주어서 맛있게 먹었다. 예안면사무소에 도착하니 와~ 작은 면사무소가 아니라 우리 화곡동의 주민센터보다 더 멋지고 무슨 컨벤션웨딩센터 같았다.
우리가 뭐라고, 일요일인데도 고향을 방문한 손님들을 맞기 위해 김장훈면장님을 비롯해 빨간모자를 쓴 산불방지요원, 그리고 면사무소 직원들이 모두 나와 맞아주었다. 예안면은 안동댐공사가 완료되고 1974년 7월 1일자로 월곡면이 완전 페지되자 예안면의 원래 9개 리와 월곡면의 정산, 구룡, 미질, 주진, 계곡, 도목, 기사 등 7개 리를 편입시켜 16개 리를 관할하고 있는데 면소재지가 아이러니하게도 편입된 월곡의 정산리인 것이다.
간담회가 시작되고 서로 소개하는 시간이 주어지면서 우리나라에서 최초이자 최고로 일곱차례나 당선되어 7선의원의 영광을 안고 있고 이곳이 선거구인 이재갑시의회 의원과 우리 임동초등학교 동기인 친구 권기익시의원이 예안면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서 마음이 뿌듯했다. 와룡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수자원이 있는 관계로 각종 규제와 제재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 예산도 증가시켰다고 했다. 총면적의 78%가 임야인 산간오지의 면으로 고추와 사과가 주특산물이었다.
그런 산간오지의 특성을 이용한 솔골마을의 토째비축제는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힐링축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청량산과 일월산으로 둘러쌓여 8가구 10명의 주민이 전부인 인계리 솔골마을 사람들은 그들만의 생존을 위해 <인계복지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매년 가을에 토째비축제를 여는데 역동 우탁선생 유적지 답사도 하고 각종 토째비체험 한마당도 열고 토째비 음악회도 여는 등 알찬 행사로 자연청정마을을 관광화시키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된장 고추장 장아찌 메주 등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류회장님께 토째비를 홀린 장류 한 상자를 선물하자 회장님은 즉석에서 회장단 모두가 한 상자씩 사자고 제의하여 즉석 판매가 이뤄졌는데 된장 맛을 보니 옛날의 엄마손맛과 똑같았다. 지역의 특성을 알차게 이용하면 이렇듯 오지 산간마을도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분 좋게 사과 한 박스씩을 선물로 받고 텔레비전을 기증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방문지인 전주류씨 삼산종택으로 향했다.
류회장님은 우리가 궁금해 하는 전주류씨나 무실류씨나 그 시조는 같다고 하셨다. 전주류씨의 시조인 류 습의 8세손인 류 성이 안동의 무실 (임동면 수곡리)에 정착하면서 그 후손들이 크게 문호를 넓혀 번성해온 가문이니 무실류씨로 쓸 만도 했다.
주진리에 있는 전주류씨 삼산종택도 주인이 없는 빈 집이며 대문이 없이 마당에 연못이 있는 게 특이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6호로 지정된 삼산종택은 영조 때 지은 집이라고 하니 그 역사가 얼마인가? 요즘 몇십 년도 안 돼 부서지고 새로 지어지는 집에 비하면 옛집은 정말 그 가치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종택의 주인인 삼산 유종원은 영조 때의 학자이자 명신으로 대사간을 지냈는데 높은 인품과 경륜을 지닌 목민관으로서 목민심서에도 그 치적이 실려 있다고 한다. 삼산이라는 호는 이 종택 안 대청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산봉우리 셋이 나란히 보이는데 이것을 보고 선생은 자신의 호를 삼산으로 지었다. 그 후 선생의 호를 따라 마을 지명도 자연스레 삼산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고풍스런 고택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울린다. 누대에 걸쳐 그 후손들이 선조를 섬기며 살아온 흔적들이 어찌 번쩍거리는 집만 보이는 우리에게 그 의미가 울림으로 다가올까. 그래도 우리 향우님들은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옛날과 오늘을 소통하느라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여 본다.
이번에도 역시 문화유적지답사로 진성이씨 종택인 경류정을 찾아간다. 와룡면 주하리에 있는 이곳은 국가민속자료 제291호로 얼마전에 지정되었다고 한다. 종손이 직접 기거하며 종택을 돌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고택이지만 집도 훈기가 돌고 집터가 내가 보기에도 아담하고 멋져보였다. 앞에 마주보는 반달모양 의 산도 멋있다. 이곳은 퇴계선생의 큰집으로 주촌종택으로도 불리는데 증조부를 불천위로 모시는 진성이씨 대종택 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慶流亭> 현판은 퇴계선생이 직접 써서 걸었다고 한다. 시조는 이 석이며 고려말 송안군 이자수가 600년 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내려왔을 때 그도 함께 이주했다가 말년에 이곳에 터를 잡고 현재까지 27대째 이어져오고 있다. 사랑채 마루에 <古松流水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늙은 소나무가 물처럼 흘러가는 곳이라는 시적이고 낭만적인 이름을 가져서 흐뭇했다.
무엇보다도 경류정을 말하자면 자연히 따라오는 게 이 집의 역사와 함께한 수령 600여 년의 뚝향나무를 들 수 있겠다. 천연기념물 제314호로 지정된 뚝향나무는 가지가 옆으로 뻗는 특색 때문에 가지를 지탱할 나무받침대가 37개나 받쳐 있다. 정말 집도 나무도 격동의 오랜 세월 살아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에 애잔함이 번져온다.
경사스러움이 물처럼 흐른다는 경류정을 나와 이번에는 광산김씨 종택이 있는 군자마을로 갔다. 작년에 도산의 가송으로 깨복쟁이 초등학교 친구들과 더위사냥을 왔을 때 들렀던 곳이라 낯선 곳은 아니지만 그 때는 건성으로 돌아보아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 우리 임동의 지례예술촌처럼 수몰될 위기에 처한 종택의 서까래 하나 기왓장 한 장까지도 종손이 그대로 옮겨앉힌 곳이 지례마을이고 이곳 군자마을이었다. 그러고보니 종손은 타고나는 것 같다.
와룡면 군자리길의 산중턱에 2단으로 구분되어 위치한 군자마을은 원래 낙동강 기슭에 위치한 '외내'를 재현한 마을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에 광산김씨 예안파의 입향조인 김효로가 마을에 터를 잡은 이래 그 일가가 약 20대에 걸쳐 마을을 이루고 있다. 안동댐 완공으로 외내가 수몰될 위기가 닥치자 모든 가옥과 정자, 전적, 유물 등 마을 소유의 문화재를 그대로 현재의 자리에 옮겨 앉히고 '군자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외내에서 도학군자가 여럿 배출되자 당시의 안동부사가 이 마을에는 군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다양한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여름 농한기의 세시풍속인 풋굿(호미씻이)이 매년 7월 이곳에서 안동 풋굿축제로 열린다. 익지 않은 음식을 나눠먹으며 마을사람들의 친목을 다지던 풋굿이 이곳에서 열린다니 그 때 맞춰 다시 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댐물이 가득 차면 군자마을 앞에도 물이 차오를 테고 물안개 피는 아침을 맞는 고택체험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역시 광산김씨인 김완수전월곡회장님의 배려로 차도 한잔씩 얻어마시며 군자마을을 돌아나왔다. 시내에 있는 돌이 멀리서 보면 검은 빛으로 보여서 烏川이라고도 불렸는데 그래서인지 강릉 오죽헌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검은 대나무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시간은 어느덧 점심 때가 훨씬 지나 있었다. 우리도 일정을 따라다니기 힘든데 회장님들은 다리도 아프고 많이 시장하시겠다는 생각이 든다. 옥동 칼국수집에서 김영식특임부회장님이 사주신 칼국수는 정말 맛있었다. 노란 조가 따문따문 들어간 밥에 꽁치조림, 역시 노란 알배추쌈과 열무김치로 입가심을 하고 손으로 직접 밀은 엄마손맛 칼국수를 먹는데 옆에 앉은 이면동님이 장물을 넣어야 진짜 맛있다고 해서 참 오랜만에 듣는 고향 말인 장물에 마음이 서늘했다.
어젯밤에 잠시 왔다갔던 은덕이 동생은 정말이지 우리 향우회 사람들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렇게 못한다. 떠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와서 올라가면서 먹으라고 식혜와 찰떡을 버스 안에 넣어줬다. 종이컵으로 두 컵이나 먹은 그 식혜가 그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 언제나 마지막은 시장에서의 장보기인데 이번에도 신시장에 들러 간고등어랑 젓갈도 사고 피땅콩도 사고 손회장님이 사준 문어맛도 봤다.
이제 일정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명주로 된 개량한복을 입고 오셔서 뭔가 남다르게 보였던 남후면의 신임회장님이신 권오춘회장님이 풍천의 구담마을에 구순의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300년 된 고택을 보여주시겠다고 해서 우리는 그곳으로 갔다. 하회마을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고택체험을 위한 홈스테이도 하는 구담정사는 그 대문부터 웅장하고 벽에 죽 쌓여 있는 장작도 눈길을 끌게 했다.
높게 앉은 대청마루에서 다과도 나누고 이곳저곳 고택을 구경하며 우리는 이 집이 가진 땅의 기운과 집의 기운을 느꼈다. 옛날에 노비 몇십 명은 부렸을 법한 부잣집이 분명했을 터 그 흔한 티비도 없고 냉장고도 없는 좁은 방이지만 뜨끈한 군불 뗀 방에서 여기저기 쑤시는 몸을 시원히 풀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집 뒤란에는 새끼줄에 죽 엮여진 시래기가 겨울반찬을 위해 실하게 말라가고 일직총무님이 긴 장대로 못난이 모과를 따서 나눠준다. 진짜 회장님의 구순의 어머님이 아직도 정정한 모습으로 뒤뜰 산책을 나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욕심을 줄이고 흙의 기운을 받으며 가볍게 살고 싶다는 권회장님은 40대에 증권으로 세 번 대박나자 잘나가던 증권회사를 미련없이 그만 두고 남이 가지 않은 길, 남이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한학에 눈을 떠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우리 춤인 살풀이춤과 선비춤으로 무대공연도 가졌다고 한다. 한옥과 한복, 한식까지 우리 것에 관심이 많아 곧 이곳에 내려와 살 거라고 하는데 참 멋스러운 삶을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태우고 이틀 동안 열심히 이곳 저곳을 다녔던 현대관광버스는 다행이 막히지 않는 고속도로를 달려 어느새 서울에 다 와 간다. 피곤하실 텐데도 안전하게 운행해준 기사님이 고맙고 이 행사를 추진하면서 애쓰신 홍순훈 와룡신임회장님, 휴대폰 몇 배는 될 법한 큼직한 카메라로 멋진 사진 많이 찍어준 김재훈총무님, 마을회관에서 따뜻한 잠자리와 융숭한 접대를 받게 해준 금경수예안회장님,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배를 이용해 물속의 그리운 고향을 더듬어보게 힘써준 김영식 특임부회장님께 감사드린다.
앞서서 진행하느라 수고하신 김영길사무총장님, 분주하게 안내하느라 바빴던 권영만국장과 이면동국장님, 가는 곳마다 동동거리며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열심이었던 장선화행사국장님, 사진 찍느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나에게 친구 찾아다니느라 정신 없게 만들었던 김은희SNS국장님, 길게 셀카봉을 들고다니며 곳곳의 행사 면면을 영상에 담느라 분주했던 남효용밴드 공리님, 통크게 찬조금을 내주신 류필휴향우회장님, 그리고 손요헌 산우회장님, 그밖의 각면의 향우회장님들 덕분에 내 고향 바로알기 행사가 훈훈한 추억을 안고 돌아오며 무사히 마치게 됐다.
버스 한 대로도 모자라 참여인원을 줄이는데 애먹었다는 이 행사가 참으로 고향을 위하고 고향을 그리는 아름다운 동행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향우님들 있을까? 우리 안동은 늘 옛것이 살아 있고 그것이 정신적 지주가 되는 예향의 고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할 줄 알고 위해줄 줄 안다. 60여 명이 1박2일 함께 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이 함께 하지 못한 향우님들께 그대로 전달되어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게 되기를 밤새워 글을 쓰면서 바라고 또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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