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는 대로

물빛 그리움 속에서/동무야, 놀자

권규림시인(옥희) 저 개명했어요 2017. 3. 6. 01:52


물빛 그리움 속에서

-동무야, 놀자!

 

                                                    권 옥 희

 

 

요즘은 잘 쓰지 않지만 우리 어릴 때는 친구를 부를 때 동무라는 말을 참 많이 썼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친구라는 말 보다 동무라는 말을 쓰기를 더 좋아한다.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이름 대신 쓰는 닉네임도 '길동무' 이다.

동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외롭고 힘든 길도 함께 가는 길동무.

지금처럼 너와 나 뿐인 경쟁사회에서 서로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 등 토닥이며

나란히 인생을 함께 갈 길동무가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동무야, ~!”

얼마나 정겨운 말인가?

수많은 세월이 흘러가고 이미 아스라한 기억의 저 편에서

그리움이 되어 있어도 내 어릴 적 동무는 죽을 때까지 동무이다.

 물빛 그리움이 늘 생목 메이듯 목 넘김을 방해하며

티눈같이 박혀 아른거리는 내 고향 임동.

 

전쟁 후 배고픈 설움이 온 세상을 휩쓸었던 때

보릿고개 때마다 먹을 것이 귀한 줄 알았던

선배님들 보다는 그래도 나았지만

우리는 풍요가 뭔지도 모르고 가난이 가난인 줄도 몰랐다.

배급으로 주던 딱딱한 분유 덩어리 하나 받아

깨물고 깨물어도 깨물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게 풍요였고,

찌그러진 양은대접에 강냉이 죽 한 그릇 받아먹으면 그게 행복이었다.

죽 대신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이 주어졌을 때

그거라도 먹고 싶은 걸 참아가며

집에 있는 동생들 주고 싶었던 철든 아이들이기도 했다.


불도저가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은 신작로가 미루나무 푸른 잎들이

하얀 배를 드러내놓고 바람과 까불거릴 때쯤 학교 수업도 끝났다.

한 반 60여 명, 1분단에서 5분단까지 한 분단에 20명이다.

대청소날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마룻바닥과 복도바닥을

매끌매끌하게 양초칠 하며 닦아 놓고

어른들 들에 가서 아무도 없을 집이 뭐가 좋다고

챗거리 장터에서 면사무소 뒤 새들까지

먼 길도 아닌 길을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동무들과 냅다 뛰었다.

걸음이 빨라질 때마다 책가방 대신

하얀 광목으로 허리춤에 질끈 동여맨 책 보따리 속에선

심이 부러져라 두세 자루 연필이 댕강거리며 양철필통을 울렸다.

 

측백나무와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싸고 있는 운동장 밖으로 나오면

전쟁 때 폭격으로 귀퉁이 떨어져 나간 공굴다리 밑으로

반변천 거랑물은 한 번도 마른 적 없이

장터 모태 뒤쪽 두물머리에서 노루메기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해서

무실과 한들 들판을 옥토로 만들며 흘러갔다.

장터가 서는 날이면 강변에 신나는 악극을 무대에 올리며

약장수가 들어서고 우리는 애들은 가라~ 소리를 수십 번 들으면서도

끝까지 개기며 앞자리에 앉아

울긋불긋 분장한 배우들의 모습을 신기해하며

뭔 뜻인지도 모르면서 악극을 보며 좋아하기도 했다.


봄 진달래 한창 필 때 참꽃 따먹겠다고 동무들과 뒷산을 헤매다가

우리 밭 근처에서 춥다고 누가 어떻게 불을 피웠는지는 모르지만

마른덤불로 불길이 옮겨지자 겁이 덜컹 나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었다.

저절로 꺼졌는지 어땠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나중에 봤더니 밭둑을 다 태우고

밭 한가운데 있던 무덤까지 새까맣게 타 있었다.

우리는 끝내 아무 말도 안 해서 방화범으로 완전범죄를 이뤘지만

지금 생각해도 산으로 번져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여름 날 말딱쏘와 솥가지공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뭔 재미로 여름을 났을까?

아래쪽 말딱쏘는 남자애들이, 위쪽 솥가지공장은 우리들의 수영장이였다.

하얀 난닝구에 까만 빤스가 여름옷의 전부였던 우리는

물가에 가자마자 밭두렁에서 난닝구와 빤스를 벗어

넓은 바위 위로 휙 던져놓고 다이빙하듯

옥례가 먼저 펄떡 뛰어내리면 마치 삼천 궁녀가 뛰어내리듯

은희와 나 차례로 물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다 배치기를 해서 배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도 맛보고

엉덩이를 바위에 부딪쳐서 죽을 듯이 운 게 누구였더라.

 

 누군가 말했듯 늘 가슴을 뛰게 하는 동무가 있어서 행복했던 시절,

거랑에 널려진 돌멩이로 대궐 같은 집지어 놀다가

배가 고파서야 집으로 오는 길.

길가 동무네 밭에서 무 하나 쑥 뽑아 입으로 돌려가며

흙 묻은 껍데기 벗기고 연초록색 윗부분 한입 베어 물 때

알싸했던 그 맛 같은 게 동무이다.

그 꿈같은 추억을 안고 있는 고향.

내 빨간 발이 채 여물기도 전에 나는 고향을 떠났지만

내가 떠나듯 임하호 물길에 고향을 내어주고

옛집도 학교도 거랑도 동무들도 다 사라졌다.

이제 그 동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함께 어울려 술래잡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구슬치기, 벼락치기,

말뚝박기 하던 열두어 살 적 동무가 되는 꿈을 꾼다.

몸이 뚱뚱하든 홀쭉하든, 머리가 벗겨졌든 허옇든,

잘 살건 못 살건 옛 동무는 보고 또 봐도 정겹다.

남자도 여자도 없다. 늙수구레 해도 그냥 동무들이다.


오징어를 씹듯 옛날의 추억을 씹으면

씹어도, 씹어도 질리지 않고 달달한 정이 베어 나오는

나는 그 때 그 동무들이 좋다.

느닷없이 사는 게 무의미하다 느껴질 때

마음속에 스며드는 물결처럼 동무의 이름을 불러 본다.

동무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