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복한 사람
-2017년 2월 18일 재경임동향우회 신년하례식에서
권 옥 희
처음 고향 떠나서 낯설었던 서울만큼
요즘 서울도 낯설다.
어수선하고 답답한 나라의 현실이
태극기를 들게 하고, 촛불을 들게 하고
가슴에 울분이 차 바로 살게 해달라는 목메임이
서울을 울린다.
축제도 아닌 것이 축제처럼 즐거운 것도 아닌 것이
어느덧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아
서울 도심 한복판엔 주말마다
애국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희안한 풍경을 보는 외국인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이런 나라의 서러운 민낯을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보게 될까?
밀려오는 물길을 감당하지 못해
징징징 울리는 댐 건설의 망치질소리 감당 못해
버티고 버티다가 대대손손 살던 정든 마을,
소중한 집을 버리고
낯선 객지로 뿔뿔이 흩어져간 내 고향 임동사람들
실향민보다 더한 한맺힘이 가슴에 수초처럼 일렁이며
수몰민이라는 상처의 딱지를
날마다 닦아내야 했다.
고향 떠난 출향민으로 살자고 자리잡은 것이
서울 아니던가?
임동 촌뜨기로 살아내기엔 결코 녹녹치 않았던 서울살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온몸을 훑고 갈 때마다
그리움 덜어낸 자리에는 절절한 눈물방울이 솟고
가슴 저 밑에 숨겨둔 껑꺼이 사투리는
시도 때도 없이 툭툭 튀어나와
혼잣말을 하게 했다.
내 고향 임동~
안동에서 영양까지
수산물과 곡물이 오고 가던 중간지점의
임동 챗거리장터에 오일장이 서서
공굴다리 밑 갱변에 약장수가 들어오면
나는 학교 끝나기 무섭게 집에 가다말고
심청전이나 흥부전 등 악극공연 보는 재미에
푹 빠지곤 했다.
장에서 할배 만나면
달달한 아이스께끼도 입에 물려지고
새끼줄에 간고등어 두어 손 묶여져
달랑거리며 들고 새들 집에 오면
나는 할배가 수저 놓을 때까지
밥숟가락 깨작거리고 있다가
할배가 남겨주는 간고등어의
짭짤 달달 비릿 고소한 맛을 음미하며
남은 밥을 먹곤 했다.
나무 하고 오는 아버지의 지겟짐에 실려오던
쌉싸름한 진달래꽃과 새파란 잎을 달고
물이 오를대로 오른 연한 송구껍질의
달달하고 텁텁했던 맛도 그리움이고
버들강아지 따먹고, 그것이 곰팡이인 줄도 모르고
보리 깜부기 따먹으며
시커먼 입을 하~ 벌리고 키득거리던
그 유년도 못견디게 그립다.
하루종일 땡볕에 타서
친구들이랑 똑같이 까맣던 피부
거랑에서 살다시피 했던 여름 날도 그리움이고
가을 날 고사리 같은 손으로
타작 끝난 논이며 밭을 돌아
이삭 주워 학교에 가져가야 했던
가난도 그리움이다.
얼음 지치다 젖은 엉덩이 말리느라
얇은 스폰지가 들어간 빨간돕바가
모닥불에 녹은 줄도 모르고
집에 들어가서 엄마께 매타작당했던
그 겨울의 시린 추억도 그립다.
전쟁 때 빨갱이들이 많이 죽었다는 말을 엄마께 듣고
학교 뒷산 금당이재 밑 골짜기만 들어가도
왠지 으스스했던 어린 날.
임동중학교 축구부선수들이
빨간 유니폼 입고 구보하는 걸 보고
빨갱이 간다고 소리쳤던
반공교육 제대로 받은 나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던
이승복어린이에 버금가지 않을까?
폭격으로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학교 가는 길의 공굴다리와
측백나무와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우리 임동초등학교 운동회날 뒷켠에서
가마솥 가득 부글부글 끓던 국밥의
구수한 냄새 때문에 나는 해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총동창체육대회 때
배가 불러도 그 국밥 한 그릇씩은 꼭 먹는다.
오늘 우리는 군자동에 있는 파티대통령
신년하례식장에서
그 그리움 마음껏 뱉어내리라.
형님요, 오빠야 오셨니껴?
누님요, 언니야 반갑니더~
해가 바뀌고 선후배가 한자리에 모여
신년인사를 하는 자리
예전에는 불암산에서 산우회 시산제를 끝내고 했으나
올해는 신년하례회 따로
윷놀이를 겸하는 시산제 따로 행사가 열린다.
그만큼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게
고향사람들이고
각자 특색 있게 재미있는 행사다.
행사장에서 다른 면민들은
마을 단위로 자리배치를 하겠지만
우리는 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임동초등학교의 선후배 기수별로 모여 앉는다.
어려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채
떠난 마을사람들 보다는
깨복쟁이 초등학교 동무들이
더 친근하기 때문이였다.
행사를 앞두고 언제나 마음 걱정하는 건 집행부일 것이고
홍보담당인 우리 은희는
향우회 밴드에 행사일정 공지를 올려놓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눈물을 철철 흘리는 이모티곤을 올렸다.
총무인 기룡이와 숙자는 향우님들 많이 와 달라는
부탁의 글을 수차례 밴드에도 올리고
개인 메세지도 보내왔다.
그런데 행사날짜가 하필 토요일이고 저녁시간이다.
아이들 수업이 토요일에 몰려 있고
이미 한번 쉬어서 참석할 수 없는 입장이 된 나는
참 난감했다.
그래서 밴드에도 메세지에도
간다, 못 간다 답글을 쓸 수 없었다.
일단 은희한테는 갈 수 없다고 말해 놓았던 터라
그냥 무심한 척 뒷전에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행사날짜가 다가오자
마음이 그냥 있질 못했다.
용기 있게 엄마들한테
사흘간 오전에 가서 보충한다고 하고
어렵게 수업을 뺐다.
역시 내가 간다고 제일 좋아하는 건
내 소꿉동무 은희였다.
옆에 있기만 해도 힘이 된다니
그랬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함께 있기만 해도 즐겁다.
저녁 여섯 시에 행사시작을 앞두고
파티대통령은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했다.
서로 반갑다고 얼싸안고
우리 임동의 자랑거리들이 프랭카드에 인쇄되어
뒷벽을 장식했다.
상탁이와 기중이는 부지런히 선물을 담고
무일이 동생과 외선이와 미영이는 접수대에서
숙자총무를 도와 회비와 찬조금을 적고
방명록을 적는 것을 도와주었다
우리 은희는 여전히 행사장에 들어서는
향우님들 모습 하나하나 사진기에 담아내기 바빴다.
올해 주관기인 55회 예쁜 동생들은
일렬로 서서 손님들을 맞았다.
우리 이상석회장님과 류창식, 류수번, 김용진대선배님,
또 다른 면에서 귀한 걸음 해서 오신
초대손님들도 자리를 잡았다.
특히 아침에 고향인 풍산에 일이 있어 가셨던
이준석회장님은 월곡과 예안, 임동은 수몰민들이여서
위로차원에서도 꼭 참석해야 한다고
부라부랴 올라오셔서 자리해 주신 게
보통 사랑의 마음이 아니면 못할 일이여서
너무나 감사했다.
예안의 금경수회장님, 월곡의 김영식회장님도
우리와 수몰된 고향을 가진 동병상련이여서
함께 해주셨다.
길안향우회 김시락회장님도 오시고
김영길 안동향우회 사무총장님을 비롯해서
남효용 밴드공동리더님,
최병태 풍천총무님과
임훈종국장님, 김기대국장님
길안의 임하섭총무님과 김복련님,
와룡의 김현자님과 김재훈총무님,
녹전면 조찬일총무님과 북후면 김경자총무님,
그리고 일직면 김경희총무님까지
다른 면에서 우리 임동의 행사를 축하해 주기 위해
바쁜 시간을 내어 주셨다.
어느새 파티대통령의 넓은 홀은
우리 180여 명의 고향 선후배들로 가득차고
행사가 시작되었다.
회장님과 임동향우회기를 선두로
회장님 사랑해요~
산우회장님 사랑해요~
55회 주관기를 사랑해 주세요~
라고 써진 피켓을 동생들이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입장을 마친 뒤
목소리 쩌렁쩌렁한 기룡이의 사회로
항상 임동인으로서의 예의를 강조하시는
회장님 인사말과 내빈 소개, 케잌거팅,
주관기수들이 세배를 마치고 건배를 한 뒤
즐거운 식사시간이 됐다.
음식이 모자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음식이 맛있고 푸짐하다.
갖가지 정보를 올려 주며
밴드에서만 보다가 함께 사진도 찍고
처음으로 인사 나눈 안신영 파티대통령이사는
내게 굴구이 접시를 일부러 따로 챙겨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우리보다 한 주 먼저 월곡면이
신년하례식을 해서 익숙한 모습이지만
작은 친절 하나에도
정감이 더 가는 건 숨길 수가 없다.
언제나 우리 46회 친구들이 많이 와서
두 테이블은 차지해야 했었는데
올해는 은희와 나, 재학이 그리고
올해 동기회장과 산우회장 한꺼번에
감투를 두 개나 쓰고 멋쟁이 신사가 된
철현회장과 총무인 상민이 뿐이였다.
흑~ 올해 환갑인데 벌써 나이들었다고 귀찮은 건가?
오지 않은 친구들 생각하며 마음이 슬퍼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43회와 44회 선배님들이 많이 오셨다.
정말 오랜만에 오신 박귀자언니가 있어서
은희와 내가 제일 큰 언니를 면했으니
반갑고도 기뻤다.
체육대회 주관기 동생들은
봄에 큰 행사를 앞두고 단합이
잘 되는지 행사장 홀 가운데를
다 차지하다시피했다.
든든하고도 흐뭇한 동생들은
젊음을 밑천으로 선후배들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면서
어울한마당을 만들어낼지 기대가 커졌다.
10여 년 전 우리가 주관기 할 때도
저렇듯 풋풋했고 열정이 넘쳐었다.
역시 살면서 젊음보다 값진 게 없는 것 같다.
어느 정도 배가 채워지자
나는 회장님과 초대손님들께
인사를 드리며 술 한잔씩 따라올렸다.
원래 술도 잘 못 마시고 숫기가 없어 잘 못하는데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나도 몰랐다
본 것은 있고 동생들이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이것도 연륜인가?
반갑게 받으시고 한잔씩 답례로 주시는
잔을 받다보니 나도 모르게 간이 커졌다.
그래서 노래 부르시는 어른들 앞에서
기꺼이 기쁨조가 되었다.
무엇이든 처음엔 어색해도
곧이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는 한덩어리로 뭉칠 수 있었다.
한도 많고 끼도 많은 임동인이니까.
멈춰 있어도 아까울 것 같은 시간은
점점 마무리할 시간으로 흘러 가고
오늘 행사의 하일라이트인
각설이와 마이클잭슨의 춤대결이 벌어진다.
완전 나이트가 따로 없다.
흥겨운 음악인 빌리진과 각설이타령에
멍석 깔아줬는데 못 놀면 바보지~^^
등에 땀이 흠뻑 나도록
내 정신 아닌 채 한바탕 난리를 치고나니
이번엔 불을 밝힌 채 유혹하는 장미꽃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태극기가 손에 쥐어지고
고향의 봄 노래를 합창하며
그리움으로 모두가 하나되는
울컥한 순간을 맛봤다.
기룡이는 회장님을 업고
우리는 손에 손잡고가 아니라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기차놀이를 하며
오래도록 이 애틋한 정
잊지 말자고 다짐하듯 했다.
돌아가는 언니 오빠 동생들의 손에
이 행사를 위해 노심초사했던 집행부가 마련한
선물이 들려지고
3월 셋째주 일요일 볼암산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한바탕 회오리처럼 지나간 시간 뒤로
선물이 모자라서 기룡이가
쏜살같이 마트에 가서 다시 사올만큼
오늘 고향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였고
이건 죽을 듯 살 듯
제일 즐겁게 놀은 내 생각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번쩍이는 조명 아래서
다같이 모여 놀았으니까
제일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가도
고향은 언제나 제 자리에 있고
비록 물 속에 있어도 내가 그리는 것은
내가 나고 자란 임동이다.
그래서 임동인으로서의 자긍심이
늘 마음 속에 살아 있고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듯
비록 물에 잠겨 있어도
돌아갈 고향이 있는 우리 또한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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