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시화 시 모음
*길위에서의 생각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녁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녁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는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저편 언덕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 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그토록 많은 비가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렸구나 밤 사이 강물은 내 키만큼이나 불어나고 전에 없던 진흙무덤들이 산 아래 생겨났구나 풀과 나무들은 더 푸르러졌구나
집 잃은 자는 새 집을 지어야 하리라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려 푸르른 힘을 몰고 어디론가 흘러갔구나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내 머리맡에선 어느새 이 꽃이 지고 저 꽃이 피었구나.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세 월
강물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홀로 앉아 있을 때 나는 들었네
그대를 만나 내 몸을 바치면서 나는 강물보다 더 크게 울었네 강물은 저를 바다에 잃어 버리는 슬픔에 울고 나는 그대를 잃어 버리는 슬픔에 울었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먼저 가보았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그 서러운 울음을 나는 보았네
배들도 눈물 어린 등불을 켜고 차마 갈대숲을 빠르게 떠나지 못했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 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 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그리움의 덧문을 닫아야 할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나무는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때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소 금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위에서 흰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을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겹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모든 것은 그대로 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 그 긴 벤치에 그대로 였다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는 사람의 머리와 가슴까지의 30cm밖에 안되는 거리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하는 데 평생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류시화/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중에서-

이문세 - 사랑은 늘 도망가 (Cello Ver.)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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