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리 아버지 지난 현충일에 왔을 때처럼
많이 아파보이지 않아 다행입니다.
나보다 작은 저 몸안에 회한의 눈물로 자라난 혹 한덩이 안고
그리움과 외로움과 내일 없는 두려움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못견디게 하지만
공기 좋은 이곳에서 그리고 혼자서도 잘 살아온 이곳에서
열심히 치료받으며 아무 눈치 안 보고
편안히 지내시는 것도 괜찮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애들 수업 마치고 집에 오니 11시.
어릴 때는 어린 대로 남의 집 사람이 된 뒤에는 남의 집 사람이라는 이유로
40년 가까이 남처럼 살아온 내 아버지 생일은 잊고 살았습니다.
난생 처음 아버지 생신을 챙겨준다는 생각에 들떠
낮에 장을 봐둔 재료로 밑반찬이며 아버지 좋아하는 반찬 몇 가지 만들고 나니
벌써 새벽 네 시가 다 되었습니다.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6시에 부천 동생네로 가서
소사동을 출발해 막힌 길을 뚫어가며 여기까지 오니 벌써 네 시가 다 되었습니다.
청송은 참 멀기도 멉니다.
“야야, 오지 마라”하던 때와는 달리 두손 잡아 반겨주는 아버지.
그렇게 커 보이던 아버지 구부정한 어깨가
언제 저 산을 혼자 넘어갈지 모른다 생각하니
또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슬픔 때문에 목이 메이지만
오늘은 모든 것 다 잊고 웃으며
아버지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즐거운 추억만 남기려 합니다.
칫~ 나한테는 왔나! 한마디 던져놓고는 올케한테는
“아이구, 야야~니 어떻게 왔노!”하면서 두손을 덥석잡습니다.
아버지에게 딸은 안 보이고 그저 큰아들 큰며느리만 보이나 봅니다.
“아버지, 올케한테 아부하지?”
아버지에게는 남겨준 것도 없이 어렵게 어렵게 살아가는자식들이 애물이고
우리에게는 짧은 인생을 엄마와 한번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늙고 병들어버린 아버지, 어머니가 눈에 박힌 돌입니다.
아버지 여태도 점심을 안 드셨다고 해서 부지런히 짐을 풀고
밥 먹을 준비를 합니다.
휴가라고 장모님과 함께 남도 한 바퀴 도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올라오자 마자 있던 짐 그대로 싣고 운전해 달려온 내 동생
언제나 듬직합니다.
이번에는 확실한 조수까지 있어 뒷짐지고 지켜보는 여유까지 있네요.
나무꾼은 어디에서든 불 피우는데는 이력이 나 있습니다.
색시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우리가 다 준비했는데도
잔치나 행사때 쓰는 커다란 아이스박스 가득 먹을 음식이 가득찼습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
우리와 또같은 정서를 가진 마음 씀씀이에
난 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숯 한 자루에 새 세숫대야를 사서 밑에 구멍 몇 개 뚫으니
훌륭한 화덕이 되네요.
아이구 더워라. 이 더위에 불까지 피우니 얼마나 더울까~
어쩌~ 박서방, 불이 잘 안 붙는감!
아~이제 불이 붙었습니다.
고기 올릴 일만 남았지요.
여자들은 시원한 물에 부지런히 야채를 씻고요.
아버지는 감독관입니다.
열심히 일 하는 것 같죠?
사실은 더위를 쫓는 중이랍니다.
아니, 열심히 일하는 것 맞네요.
나는 맏이니까 폼만 잡으면 되죠?
언니야, 우리 이따가 토종닭 삶을 때 넣을 인삼
한 뿌리 먹어도 아무도 모르겠지?
헤~내가 봤는 걸.
셀카 찍었더니 안방마님 포즈가 이 모양이네요.
드디어 상이 차려졌습니다.
내가 양념해서 볶은 아버지 좋아하는 불고기와
박서방이 구워준 숯불 등심구이
어떤 것이 맛있을까요?
고생이 고생이 아니랍니다.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네요.
상추 비싸니까 깻잎이라도 물어야지~
야야~무슨 과일을 그렇게 많이 가져왔노?
막내가 가게에서 가져왔는데
박서방이 또 가져왔네요.
이걸 언제 다 먹을까?
내가 좋아하는 노오란 참외며
싱싱한 수박이며
탱글탱글한 방울토마토며
우와~맛있는 밥상,
밥 먹을 때가 지난 허기가 무얼 먹어도 맛있을 듯
절로 군침 돌게 합니다.
으~이 행복한 표정
먹는 것 앞에 두면 모두 이런 표정이 되나요?
편안한 아버지 표정도 아들과 똑같네요.
이런 평상이 있어 마당으로 나가지 않아 좋습니다.
빨리 안 오고 뭐하노~ 빨리 먹자.
자기야, 요즘 한우 등심 비싸지?
아, 비싸긴 뭘~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이렇게 먹는 게 분위기도 있고 맛도 있고 훨씬 좋지.
자~ 우리 여자끼리 우선 한 잔 하고~ 아버지, 건배!
우리 샥시, 벌써 한 쌈 잡수셨수?
맛있는 음식이 이렇게 많은데
뭘 먹어도 제대로 씹을 수가 없어서...
한잔 술에 얼굴 붉어지기 전에
전야제로 케잌에 불부터 밝혀야지.
생신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생신축하합니다.
내가 언제 이런 걸 해봤나~ 영 쑥스럽네.
아버지 표정이 좋으면서도 떨떠름합니다.
아직도 축하 노래는 계속되고...
일흔 여섯의 아버지는 처음으로 당신 태어난 날을 축복하며
후~입김 불어 촛불을 끕니다.
한번에 꺼집니다.
아픔이 거짓처럼 사라졌는지 아버지도 우리도
아버지가 중병을 앓는 환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처음 이곳에 온 막내딸과 건배도 한번 하고...
딸 며느리와 또 한번 건배~
우리는 소주, 아버지는 사이다~
아버지는 옛날부터 술 한모금 입에 대지 못하는데
우리 오남매는 모두 앉으면 술 없이는 못 삽니다.
재미가 없으니까요.
에이, 여자들한테 질 수는 없지.
아버지, 우리하고도 건배!
힘들게 왔던 길 바로 올라갈 일 없으니
이제부터야말로 마음 푹 놓고 먹고 마셔볼 태세입니다.
아유~ 등심은 아직 안 구워지고
젓가락 빨고 있는데 이게 무슨 연기여~
너구리잡겠네.
고기 익는 동안에 한잔 더 건배!
우리 아버지 바쁘시다.
윤기 잘잘 흐르게 구워질 고기를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할까?
각자의 마음 속에 품은 생각들이 궁금하다.
카메라 타임을 맞춰놓고 하나 둘 셋~
아니, 아홉 세는 동안 찰칵
우리 모두의 모습이 모두 담겼습니다.
한번은 잘못찍혔을까봐 다시 한번~
이제 손가락 브이도 모자라서 젓가락 브이입니다.
자~모두 김치~
여보 많이 먹었쩌 / 벌써 홍단 불렀네.
깻잎 가려줄 테니 뽀뽀해봐.
에이, 아버지 앞에서 뽀뽀는 걸쩍지근하고
러브샷이나 해볼까 / 맛있지?
난 총각이라고 술 따라 주는 사람도 없고,
에고~ 서러워라.
안 따라주면 내가 따라먹지 뭐~
여기 또 올라가 있네.
지우기 뭣하니 그냥 두지 뭐.
야야~ 이제 사진 그만 찍고 얼른 먹어라.
또 건배하라고?
핏줄은 못 속인다더니
한눈에 닮은 삼부자~
대전의 영일이까지 왔으면 4부자.
우리도 머잖아 늙으면 저 모습이겠지.
분명한 것은 우리도 늙어간다는 사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이렇게 효도한답시고 부산 떨다가
돌아가고 나면 덜렁 혼자 남아
더 깊은 고독으로 스며들 아버지.
울고 싶어도 말라가는 눈물 때문에
인공눈물 대신 연기가 울어준다.
밥도 배불리 먹었으니 복불복
수박 빨리 먹기 시합~
지는 사람이 설거지하기다!
올케, 다 먹고 씨를 뱉어야지~
반칙이다!
점순이 얼굴~
못난이 얼굴~
아이구~아무리 먹어도 안 줄어드네.
그래서 우선 얼굴에 까만 씨앗 하나 붙여놓고...
아버지 집 앞을 흐르는 하천입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주왕산을 흘러나와
길안천으로 흘러간다 합니다.
지난번 낚시하던 둑에 물이 흘러넘칩니다.
이곳에도 비가 많이 왔다는 증거입니다.
모종이었던 게 이렇게 자라
무공해 고추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아버지 입맛 없을 때 몇 개 따다
된장에 꾹 찍어 드신답니다.
부른 배도 꺼칠겸
물가로 산책나왔습니다.
지는 해 아래서
물 묻힌 바람 덕에
온몸이 상쾌하기 그지없습니다.
골부리(다슬기)를 잡아본다고 하지만
지난 비에 다 씻겨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도 비가 많이 온 탓에 물이 불었습니다.
지난 번 저 뒤의 보 위에서
우리 신랑 낚싯대 들고 잡히지도 않는 고기 탓하며
폼 잡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요.
물이 넘쳐 저 건너까지 가는 것은 꿈도 못 꾸겠네요.
어느새 어두워졌네요.
토종닭백숙을 해준다며 박서방은
저렇게 들통에다 가스통까지 준비해왔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토종닭 두 놈이 저 안에서 푹 익어가고 있습니다.
만드는 건 좋은데
옆에 조수가 꼭 필요하다며
뭘해도 둘이 앉아 오순도순 소꼽장난하는 것 같습니다.
아, 뼈까지 다 발라냈네요.
그리고 마늘 넣고 양념해서 어떻게 먹을까요.
젓가락 들고 기다려봅니다.
이렇게 양념깻잎으로 싸먹을까요?
아닙니다.
부추를 살짝 데쳐서 봄에 엄나무순 데쳐서 싸먹듯
초고추장 양념한 것에 싸 먹는군요.
아유~죽여주는 맛!
술이 술술 넘어갑니다.
싫증나면 상추에도 싸먹구요.
입이 미어집니다.
먹고 또 먹고
정말 먹는데는 끝도 없습니다.
배 부르다면서, 소화제 먹어가면서
우리는 조용했던 청송, 아버지 나라에
늦은 밤인데도 고기냄새를 진동시키고
여섯 명이 뱉어내는 수다와 웃음소리로
소음을 잔뜩 퍼뜨리고 있습니다.
푸짐하고 군침 돌죠?
또, 또 러브샷 할려구 폼잡는다.
이 아가씨는 그새 졸리나~
아버지도 맛있게 드십니다.
얼굴은 번들번들~
배는 불뚝불뚝~
맛있는 국물과 또 한 마리는
박서방이 내일 아침 특별 닭곰탕을 해준답니다.
아버지, 이렇게 모여 있으니까 좋지요?
에이~ 또 판이 벌어집니다.
밖에는 비 오구요.
저건 누가 딴 돈일까요?
딴 사람은 없고 잃은 사람만 있는 게 고돌이판이라면서요.
오빠, 광 팔게 좀 죽어 봐~
아, 내가 왜 죽어~
팔아, 안 팔아!
죽을거야, 살을 거야!
밤늦도록 빗소리에 묻혀가는
시간 잡아먹는 그림놀이 ~
빗줄기가 하염없어지고
우리는 천막으로 비를 가린 뒤
나란히 자리에 누웠습니다.
끝말잇기로 이어가다가 한 두 바퀴쯤 돌았을까요.
내 차례에서 막혔나 봅니다.
벌써 자나? 하는 동생의 말이 귀에 가물가물하는 것을 들으며
청송의 꿈나라로 빠져들었습니다.
파란 종이 줄까?
빨간 종이 줄까
재래식 화장실이 무서운 올케는 신랑을 데리고
화장실 가서 보디가드로 세워놓습니다.
모기향 혼자 어둠을 지키며
빗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아버지곁에서 잘 먹고 잘 지내서인지
얼굴에 윤기가 자르르 흐릅니다.
하지만 떠나려니 또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밀려옵니다.
우리 아버지 언제까지 이 모습을 지켜내 주실런지
또 언제 찾아와 이렇게 단 하루라도 오손도손 혈육의 정을 나눌 수 있을런지
아버지 혼자 두고 가려는 자식들 마음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 갈게요~
그래, 조심해 잘 가그라
차가 길 모퉁이에서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던 아버지,
자식들이 용돈이라고 찔러준 돈에서
차비하라며 일일이 만원씩 나누어 주던 아버지.
드릴 돈이 부족해서 마음 짠한데
참 염치없게도 아버지가 주시는 복돈을 받아 지갑 맨 안쪽에 간직했습니다.
훗날 아버지 이 세상에 안 계셔도 이 추억, 이 그리움
소중하게 꺼내보고 싶어서요.
꾀죄죄했던 모습에서 세수하고 화장하니
달덩이처럼 피어난 얼굴
아버지가 예쁘다고 칭찬했습니다.
둘이서만 찍는다고
질투심 많은 동생이 낑겨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가운데서 두 내외를 갈라놓았지요?
군대에서는 카츄사 출신이셨고
젊어서는 기생오라비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잘 생기고 멋쟁이셨던 아버지.
지금도 그 모습이 남아 있긴 합니다만
흘러간 세월의 흔적은
누구도 감추지 못합니다.
박서방이 사진 잘 찍어줬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못하는 게 뭐 있냐 했더니
못 하는 게 하나도 없다네요.
연속으로 한 번 더~
아버지도 승리의 브이~
제발 사진 찍을 때 그 브이 좀 하지 말자고 했는데도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는 모델이 아니어서 어떻게 포즈를 취해야 할지 모르고
또 그 어색함을 떨쳐야 하니까요.
사진기 자동으로 놓고
모두 모여 찍었습니다.
다시 초에 불을 밝히고 정식으로 껐습니다.
아버지, 이 세상에 태어나 진심으로 사랑 받지 못했지만
당신의 생신을 온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케잌이 꽉 차도록 꽂은 양초도 당신이 빼시고요.
이렇게 인자한 미소로 다시 한번 찍었습니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갖고 계시지 않아
어쩌면 이 사진은 당신의 마지막을 지켜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애들 장난처럼 얼굴에 크림도 쿡 찍어놓고요.
폭죽 터뜨릴 때 놀란 모습입니다.
아이구 깜짝이야!
케잌 커팅도 하시구요.
이웃집에 한조각 나눠주기도 했지요.
가장 달달한 장식은 아버지 입에 쏙 넣어드렸지요.
올케는 벌써부터 더운가 봅니다.
밤새 비 내릴 때는 춥더니 우리 갈 길 알았는지
쨍한 햇살이 오늘도 꽤 더울 것을 예고합니다.
서울에는 계속 비가 오고 있다는데 말이죠.
차에 타기 전에 한 번 더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삼부자도 한 컷~
대전의 영일이까지 왔으면 사부자~
거기다 영철이까지면 오부자~
엣날 영화제목인데...
웃지 않아서 다시 한 번 김~치
아버지랑 제일 많이 닮은 나도~
두 부부 사이에서~
야야~ 너 다리 너무 많이 내 놓은 거 아니라~
카랑한 그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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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 기러기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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