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바퀴
--브레히트를 생각함--
-박윤규 -
한계령 정상, 이젠 내리막이다
기하급수로 따라붙은 가속도를 조절하느라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잡으면
단풍 설악은 풍랑 일렁이는 바다가 된다
산동네 식당 앞에 두 바퀴를 세웠을 땐
향로봉에 찔린 하늘 피가 번지고
몇 채 안 보이는 인가엔
저녁 짓는 연기가 환각제 같다
산골식당 문을 젖히고 들어서니
어깨 큰 반백 노인네가 돌아앉아 있다
등은 적당히 굽었고
목엔 역마살 깊이 주름진 강
쥐색 베레모를 푹 눌러쓰고
느긋하게 산채비빔밥을 먹고 있는
노인의 코트는 지독하게 바랜 검은 색이다
그의 왼쪽엔 보다 만 듯 접혀진 책 한 권
슬 살
픔 아
남
은
자
의
노란 표지에 회색 제목 외
더 작은 글씨가 줄을 서 있지만
그건 이미 눈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노인의 식탁 모서리를 잡고 허물어지는 나
두 줄기 뜨거운 강이 뺨을 타고 내려와
책표지에서 합류하여 제목 위로 범람한다
살아온 세월만큼 울었다고 느꼈을 때
노인은 숟가락을 놓고 내 어깨를 다독이다
연기처럼 식당을 빠져나간다
황급히 따라가니, 잠겨 가는 노을 속으로
씁쓸한 웃음과 손짓을 남기고
마른 은행잎 부서지듯 점점이 사라진다
허위적거리며 부르지도 못하고
다시 들어와 책을 집으니
"브레톨트 브레히트 시선"
아직 젊은 베베가 베레모를 비껴쓰고
흑백 명함판 사진으로
나를 깊숙하게 바라본다
접혀진 부분을 펼치니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베처럼 입술 굳게 다물고 창밖을 보면
비룡폭포에 씻은 설악산 별이 뜬다
댓잎같이 푸른 시절 불꽃으로 살아
스스로 먹장하늘길 걸어가 깨끗한 별로 박힌
먼저 태어났으나 나보다 어린 벗들의 영혼이
하나. 둘. 셋. 넷......
낮달 같은 내 부끄럼을 헨다
미안해요 밥이 늦어서
깊은 산골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내가
장작난로 옆에 고개 떨군 모습이 안스러운 듯
산채비빔밥을 내려놓는 강원도 아줌마 눈길이 따스하다
오늘은 여기에 바퀴를 세우고
어느 집 헛간에라도 등을 대야겠다
(199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박윤규 詩人
1963년 경남 산청 출생,
중앙대 문창과 졸업
199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슬픈바퀴> 당선 후
‘아침햇살’에 동화를 발표하면서 동화작가로 활동하기 시작
오월문학상에 소설 당선
한국 민물고기 보존회의 회원
<당선소감>
....지나고 보면 부끄러운 일이 왜 그리 많은지.
아홉 식구를 망치질 하나로 지커오신 아버지,
시멘트독이 올라 톡톡 갈라진 손 앞에서 나는 얼마나 부끄러워 했던가
.다시 부끄럼 바위덩어리로 굴러온 당성통보.
앙상한 겨울가로수 가지 끝에 걸린 새벽별 같은것.
그러나 나는 안다.
동트면 고대 사라질 광채 오래 빛나기 위한 길닦음은 이제부터 시작임을.
시지프스처럼 이 바위덩이를 온몸으로 굴리며 정상을 향해 가리라
오르면 다시 떨어지는 절망까지도 넉넉히 웃으며.
심사 : 황돌규 감태준
<심사평>
당선작으로 결정된 '슬픈 바퀴'는 무엇보다도 정열이 있었고,
상상력인지 진짜 체험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독특한 경험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삶의 의미가 억지없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짜임새를 만드는 능력도 있었다.
그 모습 드러냄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내부를
순간적으로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중간에 센티멘털한 부분이 있었지만 우리는 좋은
옥의 조그마한 티라고 보았다.당선자 박윤규의 앞날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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