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문태준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
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나는 내가 좋다
나의 안구에는 볍씨 자국이 여럿 있다
예니곱살 때에 상처가 생겼다
어머니는 중년이 된 나를
아직도 딱하게 건너다보지만
나는 내가 좋다
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나의 눈이 좋다
물을 실어 만든 촉촉한 못자리처럼
눈물이 괼 줄을 아는 나의 눈이 좋다
슬픔을 싹 틔울 줄 아는 내가 좋다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시골길을 가다 차를 멈추었다
백발의 노인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
노인은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나무의 뿌리가 뻗어나가는 속도만큼
천천히 건너갈 뿐이었다
그러다 노인은 내 쪽을 한번 보더니
굴러가는 큰 바퀴의 움직임을 본떠
팔을 내두르는 시늉을 했다
노인의 걸음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눈이 다시 마주쳤을 때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뻐꾸기 소리는 산신각처럼 앉아서
뻐꾸기의 발음대로 읽고 적는 초여름
이처럼 초여름 가까이에 뻐꾸기는 떠서
밭둑에도 풀이 계속 자라는 무덤길에도 깊은 계곡에도
뻐꾸기의 솥 같은 발음
뻐꾸기의 돌확 같은 발음
한낮의 소리 없는 눈웃음 위에도
오동나무 넓고 푸른 잎사귀에도 산동백에도
높은 산마루에도 바위에도
뻐꾸기 소리는 산신각처럼 앉아서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2015. 4.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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