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마음으로 오는 시

가을 억새 / 정일근

권규림시인(옥희) 저 개명했어요 2011. 11. 13. 22:26



 
가을 억새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홈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처음처럼 마음으로 오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越(월)담  (0) 2011.11.13
청량문화재 시화전  (0) 2011.11.13
가을의 전설 / 안도현  (0) 2011.11.13
가을비 속으로 / 목필균  (0) 2011.11.13
시나브로 낙엽은 지고 / 송정숙  (0) 2011.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