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는 대로

사선대에서 비를 맞다

권규림시인(옥희) 저 개명했어요 2010. 8. 6. 23:14

                                       

 

 

 

사선대에서 비를 맞다  

 

                                                      권 옥 희

 

 

일주일간의 휴가다.

하루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뒹굴고

이튿날, 시부모님 산소에 다녀오자고 신랑한테 말했더니 입이 함지박만해진다.

입이 심심할까봐 이것저것 먹을 걸 챙겨가지고 나들이가듯 길을 떠났다.

폭염으로 이글거리는 길이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지만

우리 신랑 어여쁜 마누라와 함께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 놓고

1년만에 고향 선산에 잠들어 계신 부모님께 가는 길은

힘이 하나도 안 든단다.

 

소나기가 한바탕 훑고 간 산길은

온통 흙탕물로 자동차바퀴가 빠질 정도지만

언제 비 왔냐 싶게 햇빛 쨍쨍한 산소에는

가을의 벌초 한 번으로는 양이 차지 않은 듯

풀들이 멋대로 자라 완전 쑥대머리다.

가지고 간 과일과 어머니 좋아하시던 통닭과 술 한 잔 올리며 절을 하고

중풍으로 쓰러져 20년 가까이 누워 생활하던 어머니께

그 고통 헤아리지 못하고 못다한 불효만 생각나 가슴저리게 용서빌었다.

이것저것 한토막씩 잘라 산중의 모든 귀신들 함께 드시라 고시래를 하고

신랑과 마주 앉아 어머니 맛나게 드신 닭다리 하나씩을 들고 마시는 음복주 한 잔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산허리를 휘감아 허연 김을 올리는 산을 뒤로 하고

그이가 나고 자란 고향 마을을 한바퀴 돌아본 다음

연례행사처럼 산소에 올 때마다  먹었던 쏘가리매운탕이 생각나

관촌 사선대로 방향을 잡았다.

온갖 여름꽃들이 만발한 연못 근처 호수정에서

메뉴판 볼 것도 없이 쏘가리매운탕을 시켰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4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던 곳이라 해서 사선대라는데

굵은 빗줄기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물의 두레박을 끌어올리듯 빗줄기가 하늘로 솟는 것 같았다.

보글보글 끓는 매운탕의 얼큰하고도 구수한 냄새에 취하며

찬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는데

마침 티비드라마 자이언트에서 개포동 땅 이야기가 나온다.

젊어 잘 나갈 때 말죽거리에 말뚝 하나 박아놓지 그랬냐고 하자

아 이 사람아, 당신 하나 얻었으면 됐지 뭘 더 바래!

기분 좋은 말이긴 하지만

문득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가 생각났다.

여보, 내 날개옷 돌려줘.

날개옷이 없어 하늘로 가지 못한 선녀

어쩔 수 없이 이 남자한테 묶여서

아이 셋을 낳지 못하고 어느덧 폐경이 되어버렸으니

당신은 죽을 때까지

하늘에서 내려올 두레박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라고

사선대에서 비를 맞으며

은근한 사랑에 빠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