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대에서 비를 맞다
권 옥 희
일주일간의 휴가다.
하루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뒹굴고
이튿날, 시부모님 산소에 다녀오자고 신랑한테 말했더니 입이 함지박만해진다.
입이 심심할까봐 이것저것 먹을 걸 챙겨가지고 나들이가듯 길을 떠났다.
폭염으로 이글거리는 길이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지만
우리 신랑 어여쁜 마누라와 함께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 놓고
1년만에 고향 선산에 잠들어 계신 부모님께 가는 길은
힘이 하나도 안 든단다.
소나기가 한바탕 훑고 간 산길은
온통 흙탕물로 자동차바퀴가 빠질 정도지만
언제 비 왔냐 싶게 햇빛 쨍쨍한 산소에는
가을의 벌초 한 번으로는 양이 차지 않은 듯
풀들이 멋대로 자라 완전 쑥대머리다.
가지고 간 과일과 어머니 좋아하시던 통닭과 술 한 잔 올리며 절을 하고
중풍으로 쓰러져 20년 가까이 누워 생활하던 어머니께
그 고통 헤아리지 못하고 못다한 불효만 생각나 가슴저리게 용서빌었다.
이것저것 한토막씩 잘라 산중의 모든 귀신들 함께 드시라 고시래를 하고
신랑과 마주 앉아 어머니 맛나게 드신 닭다리 하나씩을 들고 마시는 음복주 한 잔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산허리를 휘감아 허연 김을 올리는 산을 뒤로 하고
그이가 나고 자란 고향 마을을 한바퀴 돌아본 다음
연례행사처럼 산소에 올 때마다 먹었던 쏘가리매운탕이 생각나
관촌 사선대로 방향을 잡았다.
온갖 여름꽃들이 만발한 연못 근처 호수정에서
메뉴판 볼 것도 없이 쏘가리매운탕을 시켰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4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던 곳이라 해서 사선대라는데
굵은 빗줄기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물의 두레박을 끌어올리듯 빗줄기가 하늘로 솟는 것 같았다.
보글보글 끓는 매운탕의 얼큰하고도 구수한 냄새에 취하며
찬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는데
마침 티비드라마 자이언트에서 개포동 땅 이야기가 나온다.
젊어 잘 나갈 때 말죽거리에 말뚝 하나 박아놓지 그랬냐고 하자
아 이 사람아, 당신 하나 얻었으면 됐지 뭘 더 바래!
기분 좋은 말이긴 하지만
문득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가 생각났다.
여보, 내 날개옷 돌려줘.
날개옷이 없어 하늘로 가지 못한 선녀
어쩔 수 없이 이 남자한테 묶여서
아이 셋을 낳지 못하고 어느덧 폐경이 되어버렸으니
당신은 죽을 때까지
하늘에서 내려올 두레박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라고
사선대에서 비를 맞으며
은근한 사랑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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