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마음으로 오는 시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 윤지영

권규림시인(옥희) 저 개명했어요 2010. 8. 2. 15:29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 윤지영

 

 

식구들이 잠들어
오히려 부산한 여름밤
방충망 사이 모기가 부산스럽다.
모기 날개 위에 달빛이 부산스럽다.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식빵을 꺼낸다.

우유와 땅콩 버터를 꺼낸다.

키보드를 두드려 본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 깜빡이는 그리움......

우유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버터는 냉장고 속에서도 녹아 있었다.
우유는 냉장고 속에서도 상해 있었다.
노트북도 배가 고픈지 하얗게 화면이 지워진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가 사라지고, 깜빡이는 그리움이 사라진다.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식구들이 잠든 여름밤, 녹아버린 땅콩 버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허기는 슬픔이거나 그리움이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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