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밖에서 오는 비
권 옥 희
세상 안에서 혹은 세상 밖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의무적으로 비가 온다
수많은 희망을 안고 잠자는 것부터
잠들지 못하는 것까지, 그리고 죽은 것까지
출발부터 꽉 찬 곳에서 텅 빈 종점까지
그늘진 의식을 파랗게 덮으며 온다
이윽고 보이지 않던 세상이
앉을 자리 다 내어주고 허공에 선다
내키지 않는 속앓음 보일 땐
파도 같은 두려움을 주어도
돌계단을 오르는 밤꽃들의 열을 지나
손과 발이 감전된 것처럼 푸르게 선다
몇 번의 접속 끝에 투명해지도록
내 밋밋한 의식에 균열을 일으켜
젖어야 보이는 세상 쪽으로
메아리를 남기듯 세상 밖으로
낡은 덧문을 과감히 밀쳐 내는 빗방울
사랑은 그렇게
내가 먼저 젖는 것
내가 먼저 문을 열어 주는 것
오늘도 비 내린다.
가을병3
권 옥 희
저 눈부신 햇살의
위장된 포장지가 뜯겨나가기 전에는
이 가을이
따뜻할지
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의 습성처럼
내가 그립다 말하는 순간
몸의 떨림을 안고
코스모스꽃밭으로 달려가는 햇살
사랑하기 좋겠다고 살거죽을 들춰낼수록
마음이 풀어진 가슴에는 비가 내리고
누수처럼 온몸에 젖어드는
누군가의 그리움
그리워 그리워서 그리움에 먼저 닿은
코스모스는 바람을 흔들면서도
내 나이를 묻지 않았다
나, 어떡하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