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는 대로

물 속 싶이 잠긴 그리운의 저 편에서.1- 만남 그리고 이별(2006년 4월 24일)

권규림시인(옥희) 저 개명했어요 2016. 5. 5. 04:43




물 속 깊이 잠긴 그리움의 저 편에서.1

         -만남 그리고 이별




                                                  권 옥 희








열한 살의 내 꿈이 꽁꽁 묶여 있는 곳.

쉰이 되어도 늘 돌아가고 싶은 곳.

오르막이 그치는 동구 밖 어디쯤 고단한 신발을 털며

아버지와 나란히 저녁별을 안고 집으로 가던 그 곳.

안동군 임동면 쳇거리 그리고 새들.

아기산을 사이에 두고 노루목을 돌아 흐르는 앞내와

지리실을 감아 내리던 뒷내가 장터목에서 만나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던 그 곳.

만남이란 무엇일까? 

나는 40여 년 만에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깨복쟁이 동무들을 보러 그 고향에 간다.

늘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던 그리움을 펼쳐보니

실실 웃음부터 나온다.

남편은 화장발 잘 받으려면 잠을 푹 자야 한다고

얼른 자라고 성화지만 자리에 누워도

빛바랜 추억의 필름들이 무성영화처럼

내 머리와 가슴을 돌려대는 바람에 쉬 잠이 들지 않는다.




내일이면 만나리라.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달라진 모습으로

눈물겹게 만나리라.

내 기억이 어디까지 옛 추억의 끈을 이어줄지 알 수 없지만

고향이라는 뿌리와 동무라는 가지들로 내 안에서 자라난

그리움의 나무 한 그루는 무성한 잎을 틔운 채

나를 살아가게 하고 나를 쓸쓸하게 했다.




비몽사몽으로 밤을 보내고 나니 날씨가 약간 흐리다.

그래도 좋았다. 친구들을 본다는 생각에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하고 가야 친구들이 나를 기억해줄까,

이 옷 저 옷을 걸쳐 보며 정성들여 화장을 했다.

2시 조금 넘어 나를 고향에 데려다 줄 재영이의 사무실에

은희와 철현이랑 함께 도착하니 구름에 가려졌던 햇살이

축복이라도 내리는 듯 짠! 하고 눈부시게 나타났다.

재영의 텃밭에 심어진 상추가 탐스럽게 자라면

삼겹살 사와서 소주 한 잔 하면 좋겠다는 우스개 소리를 하며

우리는 고향 안동을 향해 설레는 마음을 안고 출발했다.

4월. 온통 꽃 천지다. 가도 가도 꽃이 끊이질 않는다.




내가 고향을 떠나던 날은 67년 12월 24일,

4학년 겨울방학식 하던 날이다. 우리 2반 담임이셨던

정만섭 선생님은 나의 생활 기록부에 ‘우등상, 개근상 받음’이라고

정성들여 써 놓으셨다.

서울 학교는 매월 월말고사로 성적을 가리는데

그게 무슨 소용 있다고,

선생님은 분명 서울 애들한테 ‘임동’인의 긍지를 가지고

기죽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그렇게 기록하셨을 거다.

시골뜨기라고 놀림 받으며 이 악물고 공부해

키 크다고 뒤에 앉다가 성적순으로 맨 앞에도 앉았었지만

봄이면 진달래 따먹으며 입술이 새파랗도록

이 산 저 산을 헤매었고

보리깜부기가 온 얼굴에 검정칠을 하는 줄도 모르고

보리밭 이랑을 헤치며 뽑아먹던 일.

찔레순을 꺾어먹다가 똬리 틀고 앉은 꽃뱀에 놀라

혼비백산하며 걸음아 나 살려라 했던 일들이

온 봄을 노랗게 몸살을 일으켰다.




여름엔 또 어땠는가?

하루해가 짧다고 냇가에서 살았던 때를 생각하며 구슬땀을 흘렸다.

까맣게 탄 얼굴에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이가

햇살에 반짝이던 그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사내애들과

가시내들이 펼치는 환상의 여름나기는

늘 그렇게 물에서 멱을 감으며 꿈을 부풀려갔다.

여울목이 있는 말딱소는 제법 수영을 할줄 안다는 남자애들이

수영강습 마지막 단계인 바다 수영으로 멋있게 자 헤엄을 치고

솥가지 공장으로 불리던 조금 얕은 곳에선

우리들이 개구리헤엄을 치며 놀았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하다가 배치기를 해서

배가 터지게 아픈 적도 있었고

큰물 지고 채 가시지 않은 황토물 속에서

빠른 물살에 허우적이는 동생들을 구해주기도 했다.

지금은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고

행복했던 여름이었다.

배고프면 보리등겨로 소다와 사카린 듬뿍 넣어 쪄 놓은 보리개떡과

파삭파삭하게 속살이 톡톡 벌어진 자주 감자,

그리고 옥수수면 훌륭한 간식이었고 유일한 먹거리였다.

어쩌다 우쳇걸 사시는 빵떡 할매가

아기 얼굴만한 찐빵을 한바구니 이고 우리 집에 들리는 날이면

엄마 치마꼬리 잡고 졸라 하얀 찐빵에 사탕가루 솔솔 뿌려주던

그 빵떡도 잊지 못할 맛이었다.

싱싱한 풀 한 아름으로 피워 올리는 알싸한 모깃불 연기가

마당을 가득 채우면 쌀 보다 보리가 많았던 고봉밥으로

든든해진 배를 쓸며 멍석에 누워 있으면

은하수를 버려두고 내 얼굴에 하염없이 쏟아지던 그 수많은 별들.

그 별을 보며 나는 이미 시인의 길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고향에 대한 향수는 더욱 사무쳐 갔고

잊지 않으려고 친구들 이름과 얼굴들을

매년 바뀌는 계절마다 꿰맞추곤 했다.




가을이 올 무렵이면 살이 통통 오른 떡개구리를 잡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돌멩이로 내리쳐 뒷다리만 껍질 벗겨 구워먹던

그 맛을 떠올렸다. 또 메뚜기는 어떻고.

밀서리며 콩서리도 해본 애들은 알거다.

설익은 알갱이들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주인이 올까봐

가재미눈을 해가며 우물우물 씹어대면서도

시컴둥이 된 입을 보며 서로 손가락질 해가며 웃어대던

그 얼굴들이 또한 나를 못 견디게 했다.




            밀서리




           못자리 너머

           익어가는 밀

           톡톡 튀는 소리

           바람을 태우는 소나타




           인적 드문 오솔길에

           피어오르는 실연기

           더 더욱 요란한

           바람과 불꽃과

           연기의 소나타




           입 새까맣도록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까닥까닥 부엉새

           황혼을 부르고

           들녘은 노을빛 나라

           소복한 잿더미에

           우리들 이야기,

           우리들의 비밀을 묻으면




           콩씨밭 깨씨밭 사이를

           바람처럼 내달아

           콩꽃 깨꽃

           바람처럼 나부끼고

           그때 한 줄기 저녁바람

           - 바람은 다 알지 우리들 비밀을.




은희 도시락에 떡개구리를 잡아넣어 선생님께 많이 혼났던

떡개구리 윤수는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았다.

다른 애들한테는 참 많이 괴롭힘을 주었던 것 같은데

나는 많이 봐 준 것이 이상하다.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아님 나를 좋아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님 걸핏하면 울어서 울보였던 내가 불쌍해서였을까?

작년에 처음 봤을 땐 서먹해서 물어보지 못했는데

한 번 물어봐야겠다.




나는 운동회 때마다 1등을 한 번도 못 해봤다.

키 큰 애들이랑 달리는데 1등은커녕

꼴찌만 면해도 잘 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놀랍게도 1등을 했다. 3학년 때였다.

그 때 우리는 구구단을 공부했기 때문에

달려가다 6☓9라는 카드를 잡고

또 달려가서 답을 찾는 달리기였다.

역시나는 출발이 늦어서 꼴찌로 달려갔다.

그런데 답을 찾아들고 골인점에 도착하고 보니

아이들은 아직도 답을 찾는 중이었다.

우리 할배 내가 처음으로 공책을 상으로 받자

무등을 태우고 어깨춤을 추셨다.

그 때 처음으로 나는 내가 공부 좀 한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 긍지로 서울 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공부했고

몇 년 전 늦깎이 대학공부가 힘들 때도 그 긍지로 나 자신과 싸워

결국 졸업장을 거머쥐었다.

측백나무, 탱자나무 울타리를 감싸고

푸른 가을 하늘에 드높게 펄럭이던 만국기는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서 펄럭인다.

고향 사람들 모두의 축제였던 운동회.

아침 해장국으로 소고기국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운동장 한편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검은 가마솥 속의

그 구수한 장국 냄새부터 떠올린다.








         수몰 고향




      망치질 소리

      예까지 들렸다

      머잖아 사라질 이름 새기려고

      소문은 꼬리표 달고 문패처럼 지키더니

      떠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이삿짐소리가 고동처럼 울려왔다

      구멍 난 양철지붕 빈 폐가로

      무성히 돋아난 잡풀

      뗄래도 뗄 수 없는 정붙이들의

      한숨소리가 물기둥을 몰고 온다

      제 집인 양 들어차고 앉아

      한숨소리 삼키고 서서히

      지도 위의 내 발자국을 지워간다




      내 고향은 지워져서

      가고 없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고

      숨겨진 이야기 더욱 숨기며

      떠나지 못해 발붙이고 선

      미루나무의 쓸쓸한 그림자

      이제는 멈춰야 할 수몰 고향의

      옛 이야기가

      아기산 허리춤에 감겨진다






이제 고향은 옛날의 그 고향이 아니다.

우리가 보리밥 싸들고 소풍을 가거나

토끼풀을 베고 가재를 잡고 돋나물을 뜯던

학교 뒷산 금당이재 위에 고향을 옮겨 놓고

임하댐으로 수몰되어 버렸다.

망지내 지나면 박실, 한들, 무실 그리고 늘치미,

원두들, 쳇거리장터, 새들, 우쳇걸, 굼멧골이

눈만 뜨면 마주케 하던 아기산 중턱까지 차오른 물에

고스란히 잠겨버렸다.

‘놋양푼에 수수엿을 녹여먹는 아낙이고프다’라는

노천명 시인의 싯구처럼 이제 어느 토담집에

호피 반짝이는 호롱불 켜놓고 오순도손 둘러앉아

수수엿을 녹여볼 수 있을까.

장작불로 따스해진 아국이 앞에

푸르르 넘던 보리밥 내음을 다시 맡을 수 있을까?

헌집 버리고 새집 지어 산다 한들

떠난 사람은, 그리고 남은 사람은

그 가슴에 찍힌 고향의 옛 그림자를 지울 수 있을까?

작년에 은희랑 가서 본 고향은

내가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꿈속의 고향이 아니었다.

토양이 녹아내려 뿌연 물길을 담은 댐만 덩그러울 뿐

그 어디에도 내가 살던 그 때는 없었다.

여름이면 하얀 꽃잎이 눈발처럼 휘날리던 홰나무며

크게만 느껴졌던 집이며

검은 칠을 한 나무판자 벽이 인상적이었던 학교도

모두 그 뿌연 물 속에 갇혀 있었다.

나는 ‘농사 지을 땅도 없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남은 사람은

대체 이곳에서 뭘 먹고 사나?’ 하는 별걱정에을 하면서

하염없이 물길만 바라보았다.




광호가 우리 카페에 세월을 붙잡아 두면

어음 끊어준다고 했는데

저나 나나 가겠다는 세월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광호도 보고 싶었다. 아버지끼리 친구시고

내가 새들에서 우리 아버지 와이셔츠 다리러

장터까지 타박타박 걸어가면

기특하다고 커다란 눈깔사탕 하나씩 주시곤 했는데

눈이 금붕어처럼 커다란 광호가 키는 조그마해 가지고

저는 왜 안 주냐는 눈빛으로 나와 자기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곤 하던 눈빛이 지금도 선하다.

우리 혹시 아버지끼리 정혼한 사이(?)는 아니었을까?

내가 손광호라는 이름을 안 잊어버린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또 못 잊을 친구가 있다.

바로 3학년 때 짝꿍이었던 은수이다.

은수도 눈이 왕방울처럼 크고 키는 자그마하고

무척 착하고 귀여워서 내 말이면 다 들어주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분단장이니까

내 말 안 들으면 이름 적히지, 숙제 안 해오면 슬쩍 봐주기도 하지,

그러니까 저는 내 앞에 죽을 수밖에...

그래도 내가 이 친구를 못 잊는 이유는 따로 있다.

3학년 2학기 개학하고 며칠 후 반장을 뽑는 날이었다.

나는 마침 할배가 돌아가셔서 학교도 못 갔는데

은수가 나를 부반장 후보로 추천하고 딱 1표가 나왔는데

그게 바로 은수 표였다.

그 후 나는 번번이 순희나 명화한테 부반장 자리에서 밀려나

분단장으로 만족해야 했었다.

은수는 또 얼마나 많은 놀림을 받았는지.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도 그 때는 가능했다.

순수한 마음이 자연을 닮았으니까,

산과 물, 흙들이 우리를 낳아주고 키워 주었으니까.




은희는 지금 고향 언저리에 다 왔다며

공기 냄새부터 다르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은희가 한없이 고맙다.

나는 그리워만 했을 뿐이지

친구를 찾을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고향이 물에 잠기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막막하기만 했었는데

은희네 언니와 우리 친척고모가 39기 동창이라서

은희가 내 연락처를 물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연락이 닿고 처음 목소리를 들었을 땐

꿈도 생시도 없었다.

그냥 허방이었을 뿐이다.

만나도 이름만 같을 뿐 꿈에 그리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40년 세월을 뛰어넘어 그 얼굴을 찾느라

지금도 만나면 힐긋힐긋 바라다보곤 한다.

나는 고행을 떠난 나만 그리워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순희와 옥례, 은희 모두 나를 그리워했다는 걸

만나면 가슴부터 물컹해짐에 느낄 수 있다.

밤새워 술잔을 기울이고

옛 얘기를 곱씹어도 하고 하고 또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얘기였다.




그렇다. 고향이란, 그리고 옛 동무란

어릴 때의 기억 한 토막도 소중하고

행여 잃어버릴까 할머니 고쟁이 속에 꽁꽁 싸매둔 쌈지돈 같은 거다.

그런데 고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또 친구들의 모임 장소인 솔밭 가든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두방망이질 한다.

나는 졸업도 못했는데 무슨 동창의 자격으로,

혹여 내가 불청객이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뜬 마음을 잠시 가라앉혔지만 뭐, 그래도 괜찮았다.

광웅이가 개설한 까페에 눈도장도 찍었겠다 

친구들이 몰라 보더라도 뻔뻔해지자 하는 용기가 불숙 솟았다




솔밭가든에 조금 일찍 도착하자

이 집의 주인이자 우리 동무인 남영자가 반겨준다.

서로 얼굴은 몰라도 동무는 역시 좋은 거다.

그리고 제일 만나보고 싶었던

우리 카페지기인 광웅이를 보았다.

거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마을에 살았는데

얼굴은 기억 안 나도 내가 상상했던 근엄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황순원의 그 옛날 ‘소나기’에 나옴직한 소년의 순수함이 엿보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어색함 없이 말이 놓여지고 오랜 지기로 느껴졌다.

사진 잘 찍는 창섭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페에서 쪽지 몇 번 주고받을 때 임동 지서만 지나면

다 자기 세상이래서 주먹 좀 쓰는 줄 알았더니,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고 싶은 문학도였다.

그건 상민이도 마찬가지지만 불현듯 우리 동무 중에 문인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스쳤다. 광웅이도 글 잘 쓰지,

옥례, 은희 글 쓰는 감정이 남다른데 가끔 놀랄 때가 있다.

우리 동창회 회장님인 기익이는 우리 안동 권가 38대 손이란다.

나한테 손자뻘이지만 가문의 영광이다.

조금 있자 금세 온 방을 가득 채우는 아이들.

올해 모임에 동무들이 제일 많이 모였단다.

나와 은희가 와서 그런가?

나는 내 눈에 들어오는 친구를 찾기 위해

계속 기억의 끈을 풀어 놓은 채 방 구석구석을 쫒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새들 친구들이 복자와 병수만 빼고 다 모였다.

광웅이가 우쳇걸 파워가 세다고 했지만 우리 새들도 만만치 않았다.

나를 비롯해서 기원이, 종필이, 영한이, 은희, 옥례, 순희

거기다 병수네 옆방에 살던 조순행이까지

‘아이구, 우리끼리 반창회 해도 되겠다!’고

너도 나도 좋아라 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광호도 은수도 나왔다.

나는 동창회 와서 짝꿍 만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했다.

어렸을 때 동그랗고 귀엽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은수는 한 술 더 떠서

동창회에서 첫사랑 만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했다.

쇠전을 휩쓸며 괄괄했던 석순이가 오면 남자애들 거시기는 꼭 한번씩

잡히고 혼비백산 한다고 하더니 그건 사실이었다.

여전히 여장부답고 순수했다. 사내들 끼리끼리 모여앉아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석순이 ‘빨리 안 온나, 고추 확 잡아뿔라!’ 하면

너도나도 슬금슬금 일어나는 폼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래서 불알친구라고 하고 깨복쟁이 친구라고 하는 것 같았다.




맛있는 불고기를 제쳐두고 취나물을 된장에 푹 찍어 먹는데

그 알싸한 맛이 왜 가슴을 멍하게 만들던지

나는 ‘이게 바로 고향 맛이야!’라는

생각으로 한 세 번쯤 주방으로 취나물을 가지러 갔다.

주방 아줌마는 남의 속도 모르고 ‘생전 취나물 구경도 못했나?’

하며 의아해 했을 거다.

술이 몇 순배 돌고 기분 좋게 얼굴이 달아오를 무렵

대구 사는 은숙이가 왔다.

저 모르면 간첩이라고 해놓고

나는 장터에서 생선가게를 하던 저를 아는데

저는 나를 모른단다.

주근깨도 없으면서 ‘나 주근깨 은숙이!’ 라고 한 건 무슨 심보람.

나는 많이 늙었는데 저는 주름살도 없고,

그 비법은 아마 어렸을 때처럼 하고 싶은 말 시원하고 빠르게

다 뱉어 내어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건강하고 밝은 모습을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멋지게 단체사진을 찍고 노래가 시작됐다.

우리의 정서는 언제나 똑 같은 것 같다.

나물 먹고 물마시듯 술 마시고 노래가 빠지면

큰일이 난다. 노래 번호를 열심히 적고 있는 형동이에게

은희가 부르는 나훈아의 ‘우정’을 들으면 눈물난다고 했더니

은희가 노래 부르는 내내 내 귀에다

‘노래하면서 안 우네’ 라고 속삭였다.

나는 속으로 ‘짜식 듣는 사람이 눈물난다 그랬재,

내가 언제 은희가 운다 캤노’ 하면서도

난 여전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은희의 이 노래만 들으면 가슴 밑바닥이 서늘해지며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

은수가 두루마리 휴지로 색스폰 흉내를 내며 분위기를 띄운다.

‘말도 잘 못하던 쟤가 저런 재주도 있네’

나는 은수가 친구를 위하여 보여주는 재주를 기분 좋게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분위기 맞춰 춤도 췄다.

나이를 먹으면 성격도 바뀌는지 뭐든지 좋은 게 좋은 거다.

점잖을 뺄 것 같으면 아예 오지를 말아야 할 자리기에

나는 최대한 친구들과 못다 한 2년여의 시간 공백을 채우기 위해

많은 얘기를 나누고 밤새도록 놀았다.

그래도 피곤한 줄 몰랐다.

밤 2시가 넘어서야 배정된 방으로 갔는데

술에 취한 성종이가 함께 못 온 색시 생각하며

먼저 와 누워 자고 있다.

은희와 나는 하는 수없이 이불을 더 얻어와

지영이와 후자 옆에 끼어 자려고 방을 나왔는데

마침 강이가 옆방에서 나왔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옥례와 순희와 새들의 여걸 4총사끼리

밤새워 얘기꽃을 피우려고 했는데

둘 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 성종이가 있다.

깨워도 안 일어나는 성종이를

지영이가 강이 보고 떠매고라도 가라고 했다.

잠결에 그 말을 들었는지 성종이는 일어나서 곱게 자기 방으로 갔다.

고향에서의 밤은 자꾸 내일을 향해 달리는데

잠이 설핏 들다 말다 하면서 날이 밝았다.

푸석한 얼굴로 화장을 하고 있는데 명화는 그 새 쑥을

줌 뜯었다며 집에 가서 쑥국 끓여 고향 맛을 느낄 거라고 했다.

“아이구, 살림꾼은 어디가 달라도 달라!”하면서

우린 잘 스며들지 않는 화운데이션을 자꾸 두들겨 대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소주에다 맥주, 산사춘에 백세주, 거기에다 양주까지 들어간 내 뱃속은

빨리 뭐라도 좀 달라고 마구 속을 긁어냈다.

시원한 선지국으로 속을 달래고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가니

봄볕은 화창하고 따사로운데 바람이 차가웠다.




은희와 나 철현이는 상걸이 차를 타고 총동창회 체육대회가 열리는

임동 초등학교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친구가 아니라 언니처럼 뭐든지 많이 먹으라고

따뜻하게 대해줬던 영자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

딸 여운 턱을 냈던 순희에게도 잘 먹었다고 말 안했다.

막걸리 한 잔 아니라 두 잔이라도 낸다고 했는데

과일하고 안주만 먹었으니까 여전히 막걸리 빚은 남아 있는 셈이었다.

아직 마음은 청춘인데 의리 없이 벌써 사위를 본 벌이다.




꽃 천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맞았다.

눈부신 아름다움이 여기 있었다. 그러나 왠지 허전했다.

학교를 둘러싸고 있던 측백나무도 공굴다리도

돌멩이를 탁탁 차고 가던 신작로도

그 길을 지켜주던 미루나무도 모두 없다.

거기에 지천명에 닿은 우리가 있다.

만국기가 운동장 가득 펄럭이고 가마솥엔 장국이 끓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 코흘리개 동심에 와 있다.

임하호를 가로지르는 긴 다리 밑으로

어딘가 나의 태를 묻은 옛집이 잠겨있을 것 같아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체육대회 식이 거행되고 우리는 각 기별로 운동장에 섰다.

아침 조회 때나 점심시간의 보건 체조 시간에 줄을 맞춰 서 있으면

앞에 서 있는 친구의 목 뒤로

콩알만한(?) 이가 굼실굼실 기어 다니는 걸 보고도

잡아주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앞에 서 있는 은희에게

“ 야, 야 니 머리에 이가 기어 다닌대이!” 라고

놀래켜 주고 싶은 걸 침 한 번 꿀꺽 삼키고 참았다.

3학년 때 담임이셨던 김길자 선생님이

교육감이 되셔서 귀빈으로 참석하심에 놀랍고도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나 “선생님, 저 3학년 때 제자 옥희에요!”하고

선뜻 나설 용기가 내겐 없어

선생님이 교장실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해는 아기산 중턱에서 연신 따뜻한 햇살을 쏟아 붓는데

물을 묻힌 바람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정없이 떨게 만들었다.

잃어버린 유년과 그리움을 묻어버린 한의 떨림이었다.

말없이 출렁거리는 호수가 아기산의 허리를 감고

내 허리로 휘감겨 드는 듯 해 나는 더욱 추위를 느꼈다.




어떤 게임이든 게임의 재미는 승부욕에 있는 거다.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우리 46기는 선배와 후배를 물리치며

결승전까지 갔다.

추워서 옷을 껴입어도 떨리는데

철현이는 산을 잘 타서 몰래 산삼을 캐 먹었나,

이 추운 날씨에도 반팔 셔츠 차림으로

맨 뒤에 떡 버티고 서서 밧줄을 목에 걸고 있다.

아직은 청춘이다 이거지?

우리 친구들이 이길 때마다 지르는 환호성은

월드컵 붉은 악마 저리 가라다.

그러나 호흡이 잘 안 맞았는지

결승전에서는 어이없게 무너지고 말았다.

상금도 있다는데 아깝다.

은숙이와 동책이가 던지는 윶놀이도 패하고

영한이는 제기차기에서 이겼다고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온다.

간밤 신나게 놀더니 집에 가서 자고 부석한 얼굴로 나타난 은수는

어젯밤 그 호기가 어디로 가고

여전히 수줍음 잘 타는 소년의 얼굴이다.

은희가 은수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야야, 니 미달이 아빠 닮았다!”

느닷없는 그 말에

나는 마침 마실려고 입에 물고 있던 물을 다 뿜어냈다.

켁켁 거리는 내 등을 누군가 토닥여 주는데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은수가

드라마 순풍산부인과의 미달이 아빠 박영규를 닮은 듯도 하다.

그렇지만 내가 웃은 이유가

미달이 아빠의 우스꽝스런 행동에

하얀 두루마리 휴지를 온몸에 감고 있던

간밤의 은수 모습이 연상됐기 때문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 거다.

지네 어메 아부지 인사 시켜준다고

꼭 집에 들리자고 하던 광호는

여태도 한밤중인지

해가 머리위에 있는데도 나타나질 않는다.




언 몸을 녹일겸 은희가 장국 한 그릇을 가져와서

소주 한 잔 하자는 말에 그릇을 들고 줄을 섰는데

꼭 강냉이 죽 타려고 양은 그릇 들고 서있는 기분이었다.

점심시간마다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들에게

커다란 국자로 한 국자씩 뚝 떠주던

그 강냉이죽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나도 양은 그릇 들고 줄 서 있다가 “ 너 집은 잘 살잖아!” 하는

누군가의 말에 선생님께 된통 혼났던 일이 떠오른다고

은희에게 말했더니 씩 웃는다.

뜨거운 국물에 소주 한잔 한다는 게

친구들이 자꾸 권하는 바람에 조금 마셨더니

이틀 동안 못 잤던 잠이 쏟아지면서

눈꺼풀을 자꾸 덮었다.

아마 앉아서 잠시 졸았을 거다.

그때 우리 여행 가방이 실려 있는 상걸이 차가 출발한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견디기가 힘겨워 은희에게 우리도 가자고 했다.

아직 게임이랑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노래자랑도 남아있고

끝까지 자리를 빛내 뒷마무리까지 마쳐야 하는데

그놈의 낮술이 원수였다.




떠날 사람은 소리 없이 가야 한다고

“ 잘 있어라. 수고했다.”

그런 평범한 인사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나는 너무 쉽게 또다시 고향과 이별을 했다.

그러나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에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만남은 이제 시작이다.

내 마음 속에 자리한 고향 병을 묻을 수 있는

동무가 있어 나의 만남은 언제고 이어질 것이고

또 무수하게 아쉬운 이별이 뒤따를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장을 오가며

소고삐 말고삐 묶어두고 장터 선술집에

막걸리 사발로 목축이던 그 쳇거리.

그 자리를 우리가 이어받으며,

또 우리 아이들이 이어받기를 바라며

뽀얀 흙먼지 일던 신작로 길을

미루나무 벗 삼아 오가던 내 발자국

아직도 새빨갛게 거기 남아있으므로

나는 40여년 만에 만난 친구들을

가슴에 앉고 즐겁게 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