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속 웃음 피는 옹달샘
-팔현계곡에서
권 옥 희
참 지독한 여름이었다.
밤에도 식지 않는 열 때문에 연신 찬물을 끼얹고
그래도 턱까지 차오르는 더위 때문에 잠을 설치는 날이 계속됐다.
매미도 못참겠는지 밤낮으로 죽어라 울어대는 날이 얼마나 갈까?
전력이 부족하다고 방송에서는 연신 에어컨 가동을
중지해달라고 방송을 내보지만
추운 것도 못참고 더운 것도 못참는 요즘 현대인들에게
에어컨을 켜지 말라는 건 쇠 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더위에 지쳐 힘들어, 힘들어 하면서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기에
복날을 맞아 보양식도 먹고, 휴가를 맞아 신나는 물놀이도 하면서
다 태울 듯 이글대는 땡볕으로 세상을 달구던 여름이
어느새 샐비어 꽃길을 건너가는 걸 지켜보게 됐다.

샤워를 하다가 무슨 소리가 들려 수도꼭지를 잠그고 가만히 귀기울여 들으니
아, 창 밑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녀석이 찾아온 게 반갑고 신통해서 나는 한참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가을이라고.
그러면 또 우리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고독이 어쩌구
외로움이 저쩌구 하겠지.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우리 고향 사람들 신나는 여름 물놀이, 계곡 산행이 있지 않은가?
작년에는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에 올랐다가
골짝을 흘러내리는 계곡에서 엎어지고 넘어지며
선후배 할 것 없이 얼마나 재미있고 시원한 물놀이를 했던가?

시간은 참 빠르기도 해서 지금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어제만 같은데
다시 일년, 그 때로 와 있다.
올해는 말만 들어도 옛날 무협영화에도 나올 법한 천마산 산행.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팔현리 깊은 산속 옹달샘 가든 앞
팔현계곡에서 물놀이를 한단다.
남양주시 한가운데 우뚝 자리잡은 해발 812미터의 천마산은
달마대사가 어깨를 쫙 펴고 앉아 있는 형상을 하고
산세가 복잡하고 험해서 소박맞은 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대도 임꺽정이 자신들 활동무대의 본거지를 삼을 만큼
높은 봉우리들로 웅장한 면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눈 내리는 겨울은 설산으로 아름답고
온갖것들 다 살아 있게 하는 봄은 신록이 좋아서 눈부시고
여름은 짙푸른 녹음으로 뒤덮혀 하늘이 안 보이고
가을엔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눈을 즐겁게 하고
온몸을 다 비춰 하늘을 끌어당기는 계곡의 맑은 물도 물이지만
봄 야생화의 소박하고 귀한 아름다움은
직접 보지 않으면 말을 말라고 한다.
그 산, 그 계곡에 고향을 잃어서 서러운 우리 임동 사람들이 간다.
그리움이 많은 사람들끼리는 그냥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읽어
만나면 만날 때마다 너도 나도 좋은 사람이 된다.

2012년 8월 19일 일요일~
여느 때 같으면 느긋하게 늦잠 잘 단꿈에 젖을 시간에
아홉시 반까지 군자역 5번 출구로 모이라는
기룡이의 문자를 받은 이상 그 시간에 가야한다.
안 그러면 천마산으로 가는 버스를 놓치고
발만 동동 구르며 집으로 돌아와야 하니까.
알람은 여섯시인데 울리기도 전에 잠이 깨고
평소엔 신랑이 운동 가라고 커피 타다 주면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해도 못 일어나서 헤매던 게 나였다.

하필이면 오늘 경기도 지역엔 폭우주의보가 내려졌다는데
비가 많이 오면 어쩌나~
우산과 우비도 챙겨넣고, 갈아입을 옷도 챙겨넣은 뒤
화곡역으로 걸어가는데, 묵직한 하늘이 품어대는 습기가
어찌나 더운지 속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이 났다.
까치산역에서 우리의 대장 철현이를 만나 함께 군자역으로 갔다.
배낭에 불룩하게 들어 있던 복숭아봉지와
오이봉지를 철현이 빈 가방에 넣고
아침도 안 먹었는데 여전히 은희가
홍어에 묵은 김치 가져오겠지? 했더니
부침개도 했다더라 면서 산에 가면 도시락 싸오지 말라고 해도
누군가 먹을 것을 다 싸온다고 하더니만 진짜 그랬다.

58회 김명화, 일명 예쁜이~
그 이른 시간에 내 몸 하나 다듬기도 빠듯하더구만
어떻게 파프리카전이며 닭가슴살냉채까지 해왔는지,
그리고 우리 친구 오성이가 가져온 돼지 껍데기볶음 죽여줬다.
종로3가역에서 은희와 시학이를 만나 군자역 5번출구로 가니
제일 먼저 오셔서 반겨주는 34회 김용진 대선배님 아니, 오라버님
그리고 산우회장님, 해동오빠, 동생들, 그런데 언니들은 없다.
여자라고는 달랑 은희와 나, 금옥총무, 명화,
처음 만나보는 49회 옥영이동생
그렇게 해서 모인 사람은 마흔 명 정도였다.

우리 친구 동원이도 지영이도 나중에 온다고 했고
44회 박귀자언니 딸 결혼식에
많이들 축하해주러 가서 그렇다고 하는데
관악산 봄산행도, 또 안동인 체육행사 때도 참석 못했던 나로서는
더 많은 언니, 오빠, 동생들을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우리가 점심을 먹을 옹달샘가든에서 제공해준 버스에 몸을 싣자
쉬지 않고 천마산을 향해 달려가는 버스 차창에 굵은 빗방울이 스쳐간다.
그러다 비 그치고 또 오고, 짧은 시간에 하늘은 참 변덕도 많이 부린다.
드넓은 오남저수지의 푸른물이
필경 팔현계곡에서 내려온 물을 가둬논 것이렸다.

거기서부터 계곡길을 가면서 가면서
와~ 저기서 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날 정도로 물이 맑았다.
버스는 좋은 물놀이 장소를 다 놔두고
겨우 자기 몸 하나 통과할 길을 어렵게 어렵게 가고 있다.
그렇게 간 곳이 깊은 산속 옹달샘~
골 깊은 계곡물 바로 위에 상이 차려져 있어 명당자리가 따로없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바로 온
수남이와 연진이동생, 또 막내동생들
다함께 어깨동무하면서 단체사진을 찍고
계곡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마음 같아서는 산이고 뭐고 그냥 저기 뛰어들어
물놀이나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래도 등산화 신고 왔으니 산에는 가야지.
디카프리오, 아니 쌍카프리오(상호)~
작년에 남한산성에서 처럼 또 누나를
소리없이 물속에 집어 넣었다가는 알아서 해~
미리 연막작전으로 엄포 아닌 엄포를 놓았다.
나는 그래도 양호했지만
수남이는 물에 빠지면서 비싼 선글래스를
물 속에 수장시켰지 않았던가?


물소리 바람소리 풀벌레소리,
온갖 여름의 소리들이 만다라처럼 펼쳐지는 계곡길에도
발을 디딜 때마다 습한 기운 때문에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눈도 마음도 자꾸 물속에 가 잠긴다.
'아, 저 물~ 저기 들어앉아 선녀처럼 우아하게 있다가 가면 안되나~'
하늘을 다 가리고 선 나무들 덕에 온통 푸름 뿐인 산 속에서
812미터 정상 봉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몰라도
우리는 분명 임꺽정의 본거지와는 거리가 먼
무릉도원 초입에 있을 터이다.
알록달록한 옷색깍들이 곱게 물든 단풍처럼
여름의 초록과 대조를 이루면서
구불구불 한 마리 꽃뱀같이 우리는 한줄로 주욱 서서
맑은 물 속까지 다들여다 보일만큼
청정한 계곡을 연어처럼 거슬러 오른다.
비릿한 풀냄새와 물냄새로 숨을 크게 쉬면서
12시까지 오르는 곳이 우리의 휴식처다.
뒷모습만 봐도 정겨운 앞사람의 체취에 묻혀 도란도란
바위마다 나무 밑동마다 깊게 낀 이끼들로
밥을 먹는 여린 생명까지 다 품어 주는
어머니의 몸 안으로 자꾸 들어간다.
문득 작년 여름에 갔던 곰배령길이 생각났다.
꿈 꾸는 하늘꽃밭 천상화원으로 가는 길도 꼭 이랬었다.
어느 산을 가든 오래도록 산은 제 몸을 허물어 자연이 되고
그 자연으로 인해 우리가 숨 쉬며 살 수 있는 것을.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것만 봐도
내 생각이 정답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님 나와봐~
선녀가 하강해서 목욕을 했을 법한 선녀탕도 지나고
이대로 정상까지 갈 건가?

힘들어, 힘들어 눈썹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하늘을 올려다 보는 순간
깔딱고개를 오르려면 좀 쉬었다 가자고
드디어 물가에 자리를 잡았다.
철현이는 누구 돌아볼 새도 없이 물에 뛰어들고
오성이가 돼지껍데기를 내놓는 바람에
막걸리병이 순식간에 비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많이 먹으면 이따가 진짜 맛있는 것 못먹을 텐데 하면서도
배고팠던 입에선 연신 먹을 것을 넣어달라고 보챘다.
배낭마다 넣어왔던 막걸리병이 다 나오고
그래서 마신 것이 막걸리 서너잔에
동생이 관절에 좋다면서 건네준 마가목주 서너잔
너무 많이 마셨나? 그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자~ 이제 출발합시다! 산우회장님이 신호를 보내도
용진 오라버님~ 아이고 나는 이제 못간다.
갈 사람은 깔딱고개 넘어가서 정상까지 갔다오고
옥희야, 우린 그냥 여기서 놀자~ 얼마나 좋노~
그 말에 주저앉아버린 사람들이 삼분의 이가 될까?
술도 잘 못하면서 마신 술에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하자
나는 신발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체면상 철현이처럼 풍덩 빠질 수는 없어
시원한 엉덩이의 감촉을 느끼며 앉았는데
으아~ 등산복도 안 입고 뒤늦게
어느 배우처럼 우아하게 하고 온 우리 수남이
이번엔 철현이가 번쩍 들어서 물속에 풍덩!
그래서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신나는 물싸움이 시작됐다.

복수하듯 우리 명화, 용감하게 달려들어
철현이는 그레꼬로망형의 레슬링 시합처럼
빠때루 자세로 명화 밑에 깔렸다.
에구구~ 사람살려!
물놀이 삼매경에 빠져 산행대장이 정상도 못밟다니
철현이 대장 이래도 되는겨? 하고 산에 갔다온 사람들이 따져도
대장은 할 말이 없을 거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은희,
후문에는 쉬하러 들어왔대나 어쨌다나~ㅋ
검은 옷을 입어서 그런지 명화는 한 마리 수달처럼 계곡물을 누볐다.

정상에 올랐던 사람들이 내려오고
2시부터 예약된 점심을 먹고 본격적인 물놀이를 하기 위해
우리가 앉은 자리는 과일껍질 하나 떨어진 게 없이
말끔하게 청소하고 옹달샘으로 내려왔다.
오는 길에 고향에 갔다가 이리로 바로 왔다는 동원이를 만나
함께 내려오는데 갈 때는 말짱하게 갔던 다리가
올 때는 제멋대로 흔들대고 눈은 자꾸 감기고
그 놈의 마가목주 때문에 맛있는 것도 못먹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난 참 많이도 애썼다.

식사자리에는 어느새 회장님도 오셨고 우리 지영이와
결혼식에 참석했던 선배님들도 오셨다.
그러고 보니 50여 명이 넘는 고향 선후배가 한 상에 주욱 앉았다.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지만 아무것도 당기지 않았다.
물속에서 빨리 열이 식기를 기다리며 졸기도 하다가
누가 부르면 또 붙들려 갔다가
못견디면 물에 또 들어가고
은희가 옥희야~노래하자 하는 소리에 정신 번쩍 나서
해동오빠와 박자 맞춰가며 노래하고 춤추고
댄스단짝인 우리 명원이는 왜 안 왔을까, 그리고 멋쟁이 기중이는...
안 온 동생들의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하면서
은희가 분명 우리 옥희 없으면 안돼~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다들 물속으로 뛰어들어 물싸움을 하고 물폭포를 맞고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서 고향의 말딱소나
공굴다리밑의 거랑에서
멱 감던 어린시절을 떠올렸을 게 분명하다.
웃고 있어도 그 아련한 눈동자 너머
우린 무엇을 해도 고향이야기가 우선이고
고향생각이 먼저인 것 같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리움.
우리는 그리움이 많아서 더 정다운 게 아닐까?
깊어간 여름 끝자락에서
오늘 천마산 팔현계곡의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아이처럼 천진하게 피워낸 웃음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을 남겼고
페이지 한 장씩을 넘길 때마다 그래 그랬었지~
우리가 먼 이야기처럼 고향에서의 한 시절을 얘기하듯
또 하나의 얘깃거리로
아름답게 씹힐 수 있는 양분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