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유월! - 분단의 시
우리는 평화를 원해요~
비무장지대
-조팝꽃을 보며
권 옥 희
안개비 그치자
이곳은 햇살부터 통일이다
그 전, 잠깐 내렸던 안개비는
잘 깨지지만 잘 깨어지지 않는 사이에 이념 하나를 두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
오랫 동안 맡지 못했던 사람의 냄새
반가움인지, 잠깐 눈맞추고 스치는 인연인지
안개비 그치자
조팝꽃들 가만히 귀를 열고
솜털 뽀얀 병사들이 하나 둘 물방울 털어
배고픈 군화를 꿰찬다
푸른 군복에 작대기 하나 혹은 둘
격전지마다 흘렸던 피며 눈물이며
팝콘처럼 터지던 아우성이며,
죽음이 죽음을 부르는 하늘은
이 땅에 무엇을 걸어두고 안개비를 흩뿌렸던가
무심히 바라보는 나와
잘 깨어지지만 또 깨어지지 않는 이념의 사이에
무장해제인 그 그늘 밑에 놓인 우리는
여태도 비무장지대
이리 허탈하게 빈 사랑을
빈 눈물을 빈 땅에 흘리며 살았구나
그래 한번 눈 감았다 뜨는 눈꺼풀
그 찰나와 맞물려
저- 저 다시는 총성 울리지 않을 지평
고통이라던가 아픔이라던가
가장 뼈저린 절망마저 텅 빈 땅
조팝꽃 무더기에 혼만 두고
너와 나는 모두 어디로 가서 몸만 버렸구나
적과 적이 없는, 보기만 해도 목메이는 꽃잎들
서로 몸을 맞대고
싸늘한 체온을 삭히고 있구나
돈도 되지 않는 자유의 의지가 외롭구나
텅, 텅, 빈, 땅에서.
괜히 벽이라도 두드려보고 싶은
-노동당사
권 옥 희
‘전쟁은 끝났는데’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집
우~우 자유를 외치는 혼들이
그 집에 떠돌고 있어
한낮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냄새
살은 썩어 편하대도
뼈는 묻지 못하는 집
햇살도 두려워 접근 못하는 집
그런대로 세월은 흘러가고
사람이 사람을 불러보고 싶은
민통선에도 봄은 오고
이웃에 무덤 하나씩 늘어나고
마을을 이루고
간간이 들어오는 햇살에
자다 깨다 졸다 깨다
괜히 벽이라도 두드려 보고 싶은
그리하여 핏자국인지, 총알자국인지
눈물자국인지
공산당과 자유당은 나름대로 행복을 찾았는지
투명한 수족관의 두 마리 키씽구라미처럼
날마다 입을 맞추며
‘그래 좋아, 좋아 사랑해’하며 살고 있는지
괜히 벽이라도 두드려보고 싶은
그러면 지독한 싸움의
무덤같이 을씨년스런 역사가
현장 저 뒤편으로 와르르 무너져가지 않을까
‘전쟁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데’
별의 왕국
권 옥 희
휴전선 철조망을 방패삼아
왕국을 이룬 별들
이처럼 죽음도 고요할까
그 많던 주검들의 순례
조팝꽃들의 순례
최전방의 밤하늘을 점령한
별들이 살아 반짝인다
지겨운 어둠과의 전쟁은,
끝없는 철책과의 의미 없는 싸움은,
참호 속에서도 헛것인 양
외로움이 불쑥 나타나고
눈 부릅뜨고 지켜야 할 반쪽의 하늘
심장도 멎을 듯한 칼날 같은 경계근무에
길을 잃은 페르시아 왕은
오늘도 안전하시다.
월정역
권 옥 희
요지부동, 오래도록 나는 이곳에 있었다
겨울바람 곤두선 바늘 끝들이 살을 꿰듯
철책선을 꿰차고 끝도 없는 지평으로 달아나도
몸 밖을 나서지 못하는 슬픔으로
우두커니 그냥 서 있었다
살 다 발라낸 생선가시처럼 뼈만 앙상했다
날마다 풍화되는 비와 바람의 상승작용,
햇살 한번 걷힐 때마다 우르르 삭신이 녹아내리곤 했다
그 날 무수히 사라져가던 사람들의 목마른 아우성과 눈물이
내가 들을 수 있는 고막의 마지막 역할이었다
거기서 역사는 끝나버렸다
잊었다 떠오르는 상실의 반세기를
반도의 소용돌이 지도 위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한계였다
쇠바퀴의 굉음과 덜커덩거리던 철로들의 소음도 푸르게 채색되는
6월은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삶의 목적지였으므로
마비된 하반신의 앉은뱅이 역사가
북녘의 하늘과 조우하는 푸르른 하늘은
언제 보아도 서늘하다
그 하늘 밑에 놓인 기억들에게
고철덩어리에 얹힌 기억의 마디들에게
붉은 피를 풀어놓고
새로운 생성을 거부하는 플랫폼의 그늘진 상처들은
저마다 부서진 몸들을 최대한 움직여
서서히 역사 밖으로 사라져 간다
갑자기 텅 비어
세상이 있고도 없는 듯 하다.
철책선
권 옥 희
예전에도 우리 적이었던가
밤을 꼬박 지켜 너를 적이라 불러야 했던가
몸이 함께 하자 해도 머리가 말을 듣지 않는
몸도 머리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생각의 중심에
오늘도 단단한 선이 그어진다
가깝고도 먼 반도의 허리가 잘룩하다
언제 걷힐까
산짐승 소리도 비켜 가는 철책
내 생각 머리 몸 한군데도
저쪽에 들여놓지 못하는,
네 생각과 머리와 몸 한군데도
쉽게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까만 밤 별이 머리 위에
‘톡’
떨어진다
철책선이
‘출렁’
이다 제 자리에서 긴장한다.
언제 이 한많은 땅에 통일이 오고
가슴 치고 울 일 없는
진짜 평화가 오려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