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야기

[스크랩] 지게를 생각하며 류현 (개두들,임동49회)

권규림시인(옥희) 저 개명했어요 2009. 11. 27. 00:57

 

지게 류현 (임동49회) 

 

지게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민족이 사용한

 물건을 등에져서 나르는 도구의 일종으로

 양다리 방아,발무자위와 함게 독특하고

우수한 생활 발명품으로 천년이 훨씬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구로 원형 그대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리어커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일상

중요한 도구였으며

 특히 산악 지형이 발달한 우리나라의

실정에서는 지게가

소달구지나 가축을 이용

운반수단 보다는 더욱 효과적이 였으며

심지어 남서해안의 평야지역 조차도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은 도로 교통이

발달되지 못했는 까닭에 

지게를 많이 사용했으며

래서 우리 민족의 情이 배있고

나아가 농부들의 피땀이 서려있는 

恨이 가득 담겨있는 눈물의 운반 도구라고

생각하 전래되는 고려장 이야기나 만적의 난.

할미꽃 전설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힘들고 슬픈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게의 종류에는 

제가지게,쪽지게,바지게,거지게,물지게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일반적로 가장 많이 사용

되는 지게로는 제가지게와 물지게등이 있으며

여기에 얽힌 지난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뒤돌아 봅니다.

 내가 국민학교 일학년이 될무렵에 

우리 고향에도 드디어 리어커가 보급 되어서

농사의 일이나 일상적인 물건들의 운반에

많은 인력의 절감을 가져 왔지만 앞에서 표현한

내용처럼 산이 많은 지형에서는 농사를 지으려면

農牛와 지게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던 시절

이므로 지게는 농부들의 분신 이라고

생각할 만큼 소중하고 情이 들었던 도구였다.

 

  

지금처럼 넉넉한 생활 환경도 아니고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을 만큼 곤궁했던 

우리들 앞선 세대들의 어릴적 당시 생활에서는

열살 정도만 되면 어린이 지게라고 불리는 

지금보면 큰장난감 정도 밖에 되지않는 작은

지게를 등에지고 봄이면 개울가에 가서

소꼴도 베고 여름이면 산에가서 퇴비

용 풀도 베어오고 겨울이면 뒷산에 올라가서

어설프게 땔감도 구해와야 했으니 지금의 판단

기준에서는 애처롭기 그지 없으나

당시의 처한 환경으로는 그럴 수 밖에 없으니 

어려서 부터 지게는 고달픈 생활의 상징으로

 생각하게 된다. 좀더 자라서 청년기에 이르면

아침에 일어나면서 부터 밤에 잠이 들때까지

 힘들게 지게와 씨름해야 했으

그만큼 고생도 많이했고 그래서 흔히 어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처럼 젊어서 부터

骨炳이 들어서 늙으면 퇴행성 관절에 시달리게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며 실제로 지금

그와같이 되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가 있다.

 

이처럼 恨이 맺힌 지게 이므로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벗어나서 좀더 나은 생활

 찾아서 도회지로 떠나갈 때에는 가장 먼저

지게를 부수어 버리면서 다시는 구경 조차도

지 않겠다며 다부진 각오도 보여 주는 장면도

 당시의 어린 눈으로 감명깊게 보았으니 

지게 안겨준 원망이 얼마나 컸을까 하고

짐직이 됩니다.그래서 자식들이 학교 다닐때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지게 대학을

보내 준다는 말은 당시에 왜그렇게 무섭게 들렸는지

 저는 어린 나이에도 깊이 가슴에 와닿는

말이 되어선지 제발 힘들게 지게를 지면서

 평생을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 했으며

어른들께서도 힘든 농사일 만큼은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굳은 의지의 덕분에

 힘들게 농사 지으며 지게와 생사를

 함께 하는 생활을 하지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부모님의 큰은혜를 항상

 느끼면서 올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고 다짐 해봅니다.

 

 

 그리고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서울로 떠나 가면서 우리집에서 부엌의

땔감으로 보내준 어린이의 지게를 뒷헛칸에서

찾아내어 교5학년 때부터 부모님들의 농사 일손을

거든다는 생각에 시키지도 않는 어린이 지게

 등에지고 이른 봄이 되면 황산 골짜기

도랑가에 가서 소꼴도 베어 오는 것으로

처음 지게를 등에져 보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아서 어느 일요일 오후에 소꼴을

베어서 지고 오는데 중심이 뒤틀린 상태로
힘겹게 내리막길을
 내려 오다가 그대로

지게를 땅에 쳐박게 되어 사람과 함께

 뒹굴게 되어서 어렵게 베어온 소꼴을 모두

산비탈에 버리고 팔다리에는 멍이 시퍼렇

들었지만 다시 일어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소꼴도 주워 모아서 지게를 지고 비틀 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던 참으로 뼈아픈 기억을 아직도

 잊지않고 있습니다. 당시에 일손을

도와 드리고 싶은 좋은 생각이 도리어 어른들께

근심만 더하게 되는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되는

모양 사나운 꼴이 었습니다.

 

 

그런 일이 발생한 뒤에는 더욱 조심하며

무리하지 않고 중심을 잡는 요령을 차츰차츰

혀 나가게 되면서 부터 다시는 넘어지는

일은 없었으며 중, 고등학교 다닐 무렵이면 

마침내 어른들 모양을 흉내낼 만큼 큰무게를

 짊어질 수가 있었으니 봄부터 소꼴은 물론이고

 여름에는 황산골에 가서 퇴비용 풀도 베어오고

개두들 산비탈 밭에서 땀흘려 수확한 잎담배와

 고추도 짊어지고 좁고 자갈이 많은 길도

무사히 잘다녔으며 가을에는 수확한 벼를

 비롯한 여러가지 농산물들을 운반 하는데 

한몪 거들게 되었고 겨울에는 뒷산에 올라가

 여러가지 잡목들을 베어서 땔감용으로

구해 왔으니 농부는 아니지만 어릴때 부터

 지게와는 많은 인연을 맺고 자랐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지게질의 힘든 사정을

더욱 잘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학교 다니면서 농사일에 보조적인

역활을 하면서도 지게를 지는 일이 보통

농사다 매우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하물며 어른들은 이른 봄에 농사철이 시작될

렵부터 농사일이 거의 끝나는 늦가을 까지는

 항상 고락을 함께 해야되고 농한기의

추운 겨울에도 쉴틈없이 땔감을 구하러 먼산을

 힘들게 오르내려야 하므로 사람이 고생하는

만큼 게도 함께 힘들게 고생해야 하고

잘못하면 지게 가지라도 부러지게 되면

 보통 어설픈 일이 아니므로 자기 몸을 돌보듯

언제나 신경도 쓰였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몸무게의 몇배나 되는 집채만큼

커다란 풀더미를 지고 산길을 내려오는 모습은

 바라 보는 사람들은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

모습으로 비쳐지고 또한 지게에 무거운 농산물을

지고 한손으로는 소를 몰고 돌다리를

히 걸어가는 여유있고 평화로운 장면은

일정한 수준 이상의 기술 경지에 다다른 습처럼

 되므로 아무나 쉽게 지개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으며 몇십년동안 쌓아온

 노하우가 어야 하므로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과는 생각의 괴리감이

존재 한다고 믿게 됩니다.

 

 

이와같이 예전의 일상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 하면서 수많은 영향을 끼쳤던 지게

산이 많은 우리나라 지역의 여건에 맞게 산에서

적당한 굵기의 소나무에 뻗어난 가지를

 두개 구해와서 중간에 가로막대를 연결하고

짚으로 멜빵도 만들어 걸고 중심을 잡는 막대와

 짐을 묶어메나일론 끈도 갖추면

다른 어느나라 운반 기구 보다 과학적이고

짐도 많이 운반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손수레 그리고 경운기나 트랙터의 기계적인

운반 기구의 등장으예전의 역활도

많이 줄어들고 더러는 시대의 환경에 맞게

쇠로 만든 지게도 있지만 

그래도 나무로 만든 지게는

 우리 조상들의 땀과 혼이 배어있는

전통의 운반 기구로 영원히 각인될것 이라고

생각하며 얼마전 강원도 영월 어느 마을에서

할아버지가 콩타작을 마치고 힘들게 지게

지고가는 모습이 불현듯 시간을 거슬러

어릴적 고향에서 광경을 보는 것같아서

더욱 정겨움으로 다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이 지형에 맞게 발명한 우수한

 운반 도구가 어느때 까지 현실에 유용하게

 될것인지 다시한번 생각에 잠겨 봅니다.

       

      출처 : 임동향우회
      글쓴이 : 코스모스46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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